세상은 흑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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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07 16:29조회 25댓글 1세리아
https://curious.quizby.me/Seri…


세상은 흑백. 희망도 뭣도 없는 잿빛 세상. 담배 한 개피 잡아 두 손가락 사이 끼워넣는다. 폐부 깊숙히 니코틴이 들어앉자 그제야 살 것 같았다. 까만 세상에 또 까만 연기가 그득그득 피어올랐다. 제 작은 몸으로 온 세상을 덮을 것처럼 잿더미가 활공했다. 오늘 오후에 비 소식이 있다던데. 우산도 비옷도 없어서 큰일이었다. 다 태운 담배를 건물 벽에 짓뭉갠다. 돛대였는데. 편의점에 들를까 하다가 그냥 다시 스터디 카페로 들어갔다.


공무원 시험 준비가 번번히 실패한 것도 삼 년째. 칠 급에서 구 급으로 목표치를 낮췄는데도 마냥 쉽지 않았다. 대학 동기들은 번번히 입사하고 퇴사하고 합격하고 난리도 아니던데 왜 나만. 오늘도 미적미적 문제 풀다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비다.


가방에 문제집 넣고 멍하니 쏟아지는 비만 구경했다. 물방울 굵기를 보니 이슬비는 개뿔 금방 그칠 것 같지도 않았다. 우산 사거나 그냥 맞고 가거나 두 방법 하나밖에 남질 않았는데 불행하게도 편의점은 걸어서 십 분 거리였다. 아까 갈걸 하고 후회해봤자 이미 늦었다. 가장 큰 문제는 가방 안에 든 문제집들이었다. 종이라 한번 젖으면 복구할 수도 없을 텐데. 내 몸 하나 희생해서라도 얘들은 꼭 지켜야 했다. 난 가방을 품에 꼭 안고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주위는 온통 빗소리 뿐. 머리 위로 내리는 빗물이 차다, 차.


빗물은 생각보다 맑았고 왜인지 따끔거렸다. 난 넘어질 것처럼 뛰다가 어느 순간 가만히 멈춰섰다. 이미 다 젖었는데 뛰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지. 이렇게 비 맞는 건 또 얼마만이야? 세상에 대한 굴욕적인 회의감이 솟아오른다. 공부해 봤자 돌아오는 거 뭐 있다고 이 좆만한 가방을 나보다 소중히 여길 건 뭐야. 난 가방 내팽개치려다 가만히 등 뒤로 메고 하늘 향해 고개 돌렸다. 얼굴 정면으로 빗물이 부딪힌다. 요즘은 세상 모든 게 내 머리위에 있는 것 같다. 빗물처럼. 다 발밑으로 떨어져 버리면 좋을 텐데. 그렇게도 무겁던 세상에 비해 빗물은 따갑기만 하네.


우습게도 집에 도착하기 직전 감쪽같이 비는 그쳤다. 난 축축하게 늘어진 몸 이끌고 집 앞에 주저앉았다. 세상은 흑백. 희망도 뭣도 없는 세상.


그래도 비가 그치니 무지개는 뜨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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