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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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22 23:35조회 73댓글 1천진
윤슬.

파도의 포말이 부서지고 다시금 바다로 돌아가길 반복했다. 늦봄 밤바람이 젖은 셔츠 위를 쓸고 범람하는 바다는 까만 윤슬로 나를 집어삼켰다.




육 년 전 이맘때쯤의 얘기다.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른바 멍청하고 헛된, 펄떡이는 붉은 꿈. 내가 도망친 작은 마을은 자주 한적하고 가끔 바닷바람이 불었다. 수억 번 죽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하는 작은 별들과 青春. 온종일 모래사장 위에 앉아 생각했다. 태양이 바다를 비추고 윤슬이 빛나고 파도가 밀려오고 눈동자가 그것을 꾹꾹 눌러 뇌에 새겼다. 어지러웠다.




나는 뜬 눈으로 날을 새기 일쑤였다. 더운 여름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아서, 그럼 내가 초라해지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직 창밖은 봄이 오고 있다. 안심해도 되는 걸까. 스물네 시간을 채워 날을 보내지 않으면 여름이 성큼 다가올 터. 이 봄이 지나면 여름, 여름은 지나치게 길어서 빛을 내는 모든 것들이 나를 하얗게 지웠다. 이 마을에도 青春은 빛난다. 나를 지운다. 저 멀리 아득한 별이 뜻하는바 우주는 광활히 넓은데 나는 青春빛에도 지워지는 하찮은 쓸모라는 걸 그곳에서 다시 한번 실감했다.




소녀가 있었다. 꺼져가는 별. 금방이라도 사라질까 어딘가 희미했다. 죽어가는 것을 눈앞에 두고 아름다움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마땅한 도리가 아님을 앎에도 나는 비로소 아름다움을 느꼈다. 여느 것과 다른 青春에 나는 안타까움을 느끼고 그 안으로 투영되는 나를 애써 무시했다. 문득 소녀를 통해 나를 들여다보아 미안해졌다. 깜빡깜빡 내리는 밤비에도 소녀는 버텼다.




여름감기에 걸렸다. 최근 며칠은 바다에 가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뜨뜻미지근한 방 안 나무 탁자 위에 엎드려 멀리서 밀려오는 파도를 노려보는 것밖에 없었다. 모래를 밟는 사람이 없다. 지독하게 고요해 커다란 적막과 희미한 파도 소리가 귀에 어슴푸레 들렸다. 멍하고 부쩍 뺨이 화끈거렸다. 이도 저도 아닌 감각이 몸에 붙어 현실을 잊을 것 같았다. 창문을 열어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습하고 더운 감각이 파도 저 아래로 흠뻑 뛰어든 듯한 착각이 일었다. 비로소 참된 여름이군요!




모래사장 위에 누웠다. 태양열이 피부를 익히고 따가워진 모래알이 빈틈없이 내게로 붙어왔다. 죽자. 죽어버리는 거야. 파도에 휩쓸려 떠나가자. 아직 초여름, 내가 없어도 전부 멀쩡할 테니까···, 맞죠? 바닷물이 차갑다. 셔츠가 젖고, 달라붙고, 파도와 뒤엉킨다. 青春빛, 밀려오는 파도와 윤슬, 아무도 없는 바다, 초여름의 한낮. 나는 여름이 싫다. 너무 더워서 춥다.

뺨이 붉은 건 나의 탓이 아닙니다. 파도는 나를 어디까지 데려갈까요? 이왕이면 우주의 끝 혹여나 여름의 뒷면을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럼 나는 죽은 건가요? 여름 지구를 떠난 나는 어디로 가나요? 천국에 가기 싫습니다. 죽어도 다시 죽을 만큼 싫습니다. 무쓸모한 나를 헤아려주는 것까지가 당신의 역할 아닌가요.




소녀의 발자국 소리가 파도의 일렁임과 맞물려 희끄무레하게 울렸다.

- 봄을 기다리지 않으시나요?

봄은 이미 나를 떠나갔단다.

- 봄을 기다리세요.

이제 의미가 없어.

- 여름에는 죽지 마세요.

소녀는 내 옆. 파도와 따가운 모래알에 몸을 맡겼다.



네가 먼저 우주의 끝, 혹은 여름의 뒷면에 도달한다면
그러면 나는 조금 더 여름을 살아보도록 할게.

그냥 오래 살라는 말이었어.
그것밖에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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