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익은 푸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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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06 16:38조회 54댓글 5ne0n.
그해 봄, 우리는 조금 어색했고, 또 조금 서툴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듯한 평범한 나날 속에서, 햇빛이 조금 더 따뜻하게 우릴 바라본다는 이유만으로 설레었던 계절이었다.

학교 담장 아래엔 새싹들이 돋았고, 체육복 소매 끝에는 살랑이는 바람 냄새가 묻었다. 너는 늘 그 바람 속 어딘가에 있었다. 햇살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뜨는 모습, 작게 웃을 때마다 그 사이로 스며드는 봄의 냄새. 그 향기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우리는 자주 같은 길을 걸었다. 서로를 부르지도 않았고, 특별한 말을 나누지도 않았다. 하지만 발소리가 겹치는 그 짧은 순간마다 세상이 잠시 투명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거나 하는 단어를 꺼내기엔 아직 이른 때였다. 그저 마음이 조금 앞서가고 있을 뿐이었다. 너의 푸른 그림자가 내 그림자에 닿을 때 드는 느낌. 그거로충분했다. 그때의 우리는 말보다 살랑이는 바람을 믿었다.

봄은 그렇게 흘러갔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방법을 배워가며. 눈부신 낮이 조금씩 더 길어질수록 우린 조금 더 솔직해졌지만, 또
조금 더 망설였다.

그러던 어느 날, 햇빛이 유난히 투명하고 뜨거웠던 오후에 너는 천천히 내 이름을 불렀다. 그 한마디가 오래도록 이어질 것만 같았는데, 생각보다 금방 봄은 가고 여름이 왔다.

이제는 그 시절의 공기마저 희미해졌지만 가끔 푸른 사과를 한입 베어 물면, 그때의 공기가 되살아난다. 달지도, 쓰지도 않은 풋내가 가득한 그 맛.

아마 그게 우리의 계절이었을 것이다. 아직 익지 않았기에, 더 선명히 남은 봄. 서투르고, 맑고, 그 어떤 말보다 솔직했던 아직 덜 익은 우리의 청춘.

@ne0n. :덜 익은 사과처럼
계절에 안 맞는다구요? 맞아요 옛날에 써둔 거거든요
https://curious.quizby.me/ne0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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