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curious.quizby.me/zeoz…비가 심하게 오던 날 빌린 물건이었다. 듣기론 그랬다. 아니, 애초에 빌린 게 맞나? 그 사람들은 늘 마음대로 하는데... 아버지. 그래... 그것을 아버지가 처음 들고 들어왔을 때, 나는 그냥 닮은 인형인 줄 알았다. 작고 마른 몸, 지나치게 매끈한 피부, 유리알처럼 빛나는 눈까지... 어쩐지 녹슨 속내가 나는 그것은 사람 같다고 하기엔 조용하고, 소름 끼칠 만큼 이질적이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거실 한가운데 두고 벽난로를 등진 채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어머니는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핏줄 아이를 다시 만난 것처럼 손뼉치며 다정히 웃었고, 어린 동생은 금세 장난감을 보이며 곁을 내어주었다.
나? 나는... 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정이 가지 않았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그것의 옆을 스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발 끝을 세우고 걸었고, 자꾸만 시선이 끌렸다. 웃긴 건, 그것이 분명 집안의 공기를 조금씩 바꾸었단 것이다. 가족들의 다정함과 친근함이 퍼져 나갈수록 그 속에 섞이지 못하는 내 불안은 점점 뚜렷해졌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마치 지난날의 불안이 기우였던 것처럼. 아니면 익숙해진 걸까? 잘 모르겠다. 변화는 항상 그랬으니까. 겉으론 아무일 없는 듯 시나브로 스며든다.
누전 차단기 고장으로 전기가 나가던 것도 거짓말처럼 멎었고, 비가 새던 지분은 언제 고쳤는지 멀쩡해졌다. 무릎이 아프던 아버지, 자꾸 뭔가를 까먹는 어머니, 그리고 천식으로 고생하는 동생의 병이 모두 나았다. 아픈 게 사라지니 대화가 단절된 가족이 어느샌가 화기애애해졌다. 아버지는 이게 다 그것 덕분이라 치켜세웠고, 어머니는 꼭 막냇자식처럼 예뻐했다.
“얘는 정말 눈빛이 예쁘지 않니?”
그럴 때마다 나는 대답을 삼켰다. 그 눈동자에 비친 게 어쩐지 내 얼굴인 것만 같았기에.
동생은 그것과 금세 친해졌다. 함께 그림을 그리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시끄럽게 주위를 맴돌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생의 재주에 웃으며 춤을 줬다.
‘뭐가 그리 즐거운 걸까? 뭐가 그리도.. 아니, 사실 잘못된 나인 걸까? 그렇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이상한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그것과의 거리감은 컸다. 곧 있으면 사택으로 들어가는데, 다시 돌아왔을 때 내 자리가 있긴 할까? 하지만 집안의 분위기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가족들은 벌써 그것을 하나의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내 나름의 대책이 필요했다.
모두가 잠든 어느 날 밤, 나는 조심스레 그것에 접근했다. 함부로 버릴 순 없겠지만, 약점을 찾을 순 있다.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겉옷 안쪽에서 검은 잉크로 직직 그어진 라벨을 발견했다. 잉크 아래에는 어디서 많이 본 기호와 줄이 그어진 글자들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모두를 위한 더 나은 내일.' 따위의 구호. 지워진 이것의 이름, 알 수 없는 숫자들. 나는 그것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매끈하게 닳아버린 글자를 더듬었다. 누군가 애써 지워낸 흔적은 책임이라는 단어를 가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걸 휴대폰으로 촬영하려는 그 순간,
끼이이에에엑!
날카로운 고음이 조용한 적막을 뚫고 나왔다. 놀란 나는 귀를 막고 자리를 떴다. 발을 움직이는데도 전혀 앞으로 나아가질 않았다. 그때 갑자기 바닥이 울렁거렸고, 나는 앞으로 굴러 넘어졌다. 순간 소리가 똑! 하고 끊겼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니 바닥에 검붉은 무언가가 뚝뚝 떨어졌다. 피였다. 귀에서 흘러내린 검붉은 피가 뺨을 타고 바닥에 톡톡 떨어졌다. 숨이 막혀왔다. 나는 있는 힘을 쥐어짜 고함을 내질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안방에서 헐레벌떡 뛰쳐 나왔고, 뒤이어 동생까지 거실에 모였다. 그러나 그들은 어딘가 이상했다. 고개를 들자, 가족들이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 얼굴은 각자의 얼굴 같기도 했고, 그것의 얼굴 같기도 했다. 그들은 입가에 호를 그리더니 아주 천천히 몸을 들썩였다. 그 웃음은 뇌를 직접 가격하는 듯했다. 나는 양손으로 관자놀이에 손을 갖다댔다.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사이, 곧 그것이 가족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처음 보는 행동에 나는 소름이 끼쳤다. 그것은 거만하게 내려보며 똑같이 입가를 찢듯이 비틀었다. 그날 이후, 나는 짐을 싸서 사택으로 도망쳤다. 가족으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내가 먼저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모르는 게 더 나았으니까.
비가 내리는 밤이면 생각한다. 우리 집에 눌러 앉게 된 그것이 대체 무언지, 진짜 단순히 빌린 물건인지, 혹은 우리 가족인지 아니면 그저 가족을 닮은 존재인지.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 걸 신경 쓰는 내가 문제인 걸까? 그건 이미 가족 곁에 있고, 가족은 그것을 꼭 껴안은 채 자신을 위로하며 살고있다. 이건 단지 빌린 물건이니 괜찮다면서.
그러나 나는 그게 진짜 빌린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건 사실 돌려받은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