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고 있었어. 그 일곱 글자가 왜 이렇게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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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3 18:12조회 55댓글 1세리아
하 청은 열심히도 도왔다. 좋아하는 생명이 영원히 곁을 떠나겠다는데도 그랬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느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느냐 하면 당연히 헤어지겠다는 말이었다.


인어는 자기가 하 청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 다정한 모습에 심장이 뛰는 것이 단순히 생리현상이라고만 생각했다. 손이 잡고 싶고 껴안고 싶다는 충동이 들 때는 남자 인어를 본 게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 건줄 알았다. 하 청은 그래서 되게 곤란했다. 인어의 생각을 드디어 읽을 수 있게 되었으나 자기만 나타나면 스크린이 사랑으로 도배되니. 하 청은 몸을 사렸다. 그러자 지하층 내부에서 드디어 하 청이 짤리냐 마느냐 하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하 청은 무시했다. 그래도 오 년 정이 있는데.


그런데 그게 진짜가 됐다.


하 청은 모든 일정을 끝내고 방에 들어와 제 앞으로 날라온 해고 통지서를 멍하니 바라봤다. 일시는 곧장 다음 주 월요일. 삼 일 뒤였다. 최소한 해고 삼십일 전에는 통지해야 한다는 법에도 안 걸리게 한 달 봉급은 따로 챙겨주겠다고 했다.


통지서를 받자마자 떠올린 건 지독한 상사의 얼굴이나 오 년간 회사에서 쌓은 추억 같은 것이 아니었다. 하 청은 인어의 얼굴을 생각했다. 몰래 바다로 빠져나가는 건 아무리 빨라도 예정일이 한 달 뒤였는데. 이제는 느려도 삼 일 안으로 해결을 봐야 되게 생겼다.


하 청이 시계를 봤다. 새벽 한 시 반. 기숙사 소등 시간은 진작에 끝이 났다. 최근 며칠간 인어와 대화가 가능해진 건으로 바쁘긴 했으나 마침 어제 급한 연구는 어느정도 해결했다. 오늘 야근하겠다는 연구원도 기억상 없었다. 몰래 방 밖으로 뛰어나와 어항으로 다가갔다. 어항 속은 아주 고요하고 어두웠다. 모든 사람이, 빛이 사라진 것처럼. 온전이 하 청과 인어만 남은 것처럼. 어째 시기는 딱 적당하다. 날이 좋고, 사람도 없고, 인어도 깨어 있다. 하 청이 지하 일 층으로 달려가 인어의 얼굴을 마주본다. 물에서 나온 인어는 물 머금은 눈동자로 하 청을 쳐다봤다.


[반가워]


그새 발전한 기계가 인어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하 청은 활짝 웃고 있는 인어 얼굴 보다가, 고개 떨구고 바닥만 내려다보다가. 다시 그 얼굴을 보다가 그랬다. 용기를 내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구나.


- 바다로 가자.


인어는 얼마 전 인간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직 실력이 미숙해서, 바다로 가자는 그 말을 아주 오래 해석해야 했다. 단어 바다. 그리고 조사 로. 그리고 가자. 동사 가자. 인어는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 바라던 것을 갑작스레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은 예상치 못한 행복을 가져왔으나, 인어는 잠시 웃고 말 뿐이었다. 하 청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좋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인어 자신도 하 청만큼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기뻐야 할 텐데. 분명 기뻐하는 게 맞는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입꼬리가 내려간다. 어디 신경 자극이 잘못된 건지 막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인어는 고개를 젓는다. 스크린에 [싫어] 하는 말이 박혔다.


[조금만 더
한 달 뒤에]


잘렸다는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하 청은 무언가 결심한 것처럼 보였다. 오늘이라고. 오늘이어야만 한다고. 하 청이 눈동자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항 깊은 속으로 들어가려는 인어의 가녀린 팔목을 하 청이 세게 붙잡았다.


- 나 잘렸어. 오늘 아니면 너 바다 못 간단 말이야.


인어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하려던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한 달 동안. 어떻게든 정리하고 마음 편이 바다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어떡하라고. 인어는 제 팔목을 세게 잡은 하 청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따뜻했다. 두근 하는 사이 하 청의 손끝으로, 두근 하는 사이 인어의 머리맡으로 심장 박동이 울린다. 인어는 그제야 알아챘다.


[나 너 좋아했구나]


그걸 어떻게 모르겠어. 나만 보면 스크린이 하트로 도배되던데. 하 청은 울고 있는 인어 보면서 억지로 웃었다. 그렇게라도 웃으면 다시 행복해질 줄 알았다.


인어는 웃지 못했다. 그냥 정신을 차릴 수도 없었다.


좋아하고 있었어. 그 일곱 글자가 왜 이렇게 아파.
헤어지는 건 또 왜 그렇게 어려운 건지.
인어는 떨리는 하 청의 목을 끌어안고 차라리 이대로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 지난 오 년 동안 내 인생 책임졌던 건 너야.


하 청이 인어를 들어올렸다. 순간 숨이 퍽 막힌다. 아가미가 꿈틀꿈틀. 하 청은 알고 있었다. 인어는 십 분 동안 숨을 못 쉬어도 살아있는대.


- 그러니까 네 인생도 내가 책임져.


껴안고 미친 듯이 뛰었다.

해양과학기술원 앞에는 바다가 있다.

뛰어가면 오 분이 안 걸린다.


인어는 울기만 했다. 파닥거리는 꼬리가 하 청을 세게 때렸다. 하 청은 그것보다 가슴이 더 아팠다. 해양과학기술원 내부에 엄청난 경고음이 울려퍼진다. 하 청은 인어를 굳게 안고 있어서, 제 어깨에 기댄 인어 울음 소리가 제일 크게 들렸다.


가뜩이나 뭍에 나온 인어는 울기만 하다 기절했다.

하 청은 인어를 바다에 놔 줬다.

바다는 여전히 고요하고
등 뒤로 사이렌 소리는 여전했다.

인어가 둥둥 떠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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