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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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03 20:09조회 57댓글 7아련한
그 사람은 항상 해를 등지고 있었다.
나는 늘 그 그림자 너머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 봤을 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니, 모른 척했다는 쪽이 더 가까우려나. 그는 그저 조용한 사람이었고, 조용한 사람들에겐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말이 없다고 해서 생각이 없을 리 없고, 웃지 않는다고 해서 따뜻하지 않을 리 없다고. 나는 그의 무표정 속에 있는 ‘무엇’을 오랫동안 믿었다. 아마 그게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와 함께 걷던 오후들이 있었다. 감히 함께였다고 말해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길 위에 있었고, 같은 시간에 집으로 향했고, 같은 공기를 마셨다. 하지만 우린 한 번도 같은 마음을 나눈 적이 없었다. 내 말에 그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고, 그리고 그게 다였다. 어느 날은 유난히 하늘이 붉거나 날씨가 좋아서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말해도 좋을까’ 라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언제나 그랬듯나는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그림자가 햇빛이 보이면 모습을 비췄다 구름이 해를 가리면 사라지듯, 내 마음도 그렇게 두각을 드러냈다가 조용히 흐릿해졌다. 아무 소리도 남기지 않고.

그는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 내가 알게 된 날은 이상할 정도로 바람이 잔잔한 날이었다. 그 사람의 이름을 말하며 웃는 그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 같았다.
그제야 알았다. 나는 그의 그림자와 사랑에 빠졌던 거라고. 햇빛 아래 선명해지던 어둠. 그 안에서 상상한 온기.

사랑은 때때로 그런 것이다. 말 한 마디 없이도 스스로 커지고, 끝내 말하지 않았기에 부서지지 않은 채로 남는다. 그는 내가 고백하지 않았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그가 돌아보지 않았던 방향에, 내가 서 있었다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사람을 덜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사람을 덜 사랑하게 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점점 단단해졌다. 마치 우거진 나무 아래 잠적해버린 그림자처럼 꺼내기 힘들어졌다.

어느 날 우연히, 그와 다시 마주친 적이 있다.
“잘 지냈어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긋나긋했고, 웃는 눈예은 따뜻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는 한결같았다. 그림자의 미세한 조각까지도.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그날 이후로 다시 그를 보지 못했다. 어쩌면 그쪽이 가장 나은 방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를 다시 마주치지 않아도 그림자는 태양 외의 방법을 찾아 선명함을 되찾곤 했다. 아주 천천히,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그리고 나는, 이제야 조금씩 태양 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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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조각글과 단편 사이 비스무리한 글을 작성해봤어요 :> 피드백은 대환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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