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여름은 유독 서늘했고, 동시에 숨이 차오르게 뜨거웠다.
산자락을 거닐던 결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계곡가 덤불 사이에서 바람에 울렁이던 청보라색 수국 무덤이었다. 싸아아 – 하는 바람결에 맞춰 눈앞을 파란색으로 덮었다가는 이내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어느새 보니 홧홧한 여름 날씨에 흐르던 땀방울이 말라 있었다.
풀숲 사이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제 무릎까지 오는 수국 더미에 파묻혀 꽃을 엮고 있던 소녀.
결은 서너 번 수국 더미를 흔들어 댔다. 소녀가 저를 바라봤으면 싶어 그랬다.
돌아보는 소녀의 눈망울은 때 묻지 않은 먼 산의 호수 같았다. 물살이 얕아 여울지는 곳에서 태어나 이름이 여을이라 했다. 결은 제 이름의 획을 소녀의 하얀 손바닥 위에 적어주었고, 여을은 손바닥 사이를 긋는 촉감에 해사하게 웃음지었다. 결은 말하지 못했지만 웃기만큼은 여을 못지 않게 웃었다. 여름의 초입이었다.
그날 이후로 결이 보는 여을의 곁에는 늘 물비 냄새와 수국 향이 섞여 들었다. 여을은 언제나 산길을 걸을 때 품에 수국을 안고 있었다. 왜 그리 꽃을 안고 다니느냐 물으면, 소녀는 꽃송이에 뺨을 부비며 나직이 속삭였다.
— 꽃은 좋아,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아.
그리고 결을 보고는,
— 예뻐.
하고 장난기 서린 웃음으로 말을 끝맺는 것이었다.
마치 여름 감기를 삼킨 듯
결은 머리 안쪽 곳이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러고서 둘은 종종 만나는 일이 있으면 놀았다. 여을이 수국을 엮고 있으면 결이 꽃더미를 흔들며 여을을 놀래 주었고, 결이 산자락을 뛰고 있으면 어느샌가 여을이 함께 뛰고 있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그새 여름의 끝자락을 맞았다.
워 –
노루 울음소리가 산울림을 타고 사납게 번지던 오후였다. 여을은 그날도 어김없이 제 품이 가득 차도록 수국을 한 묶음 꺾어 안고 있었다. 숲의 녹음과 수국의 푸른빛이 번져 소녀의 마른 어깨가 마치 노루의 수영 獸影 처럼 흐릿하게 일렁이던 순간이었다. 결이 저만치 앞서 걷던 여을의 이름을 부르려 입을 뗀 그 찰나, 수풀 너머에서 마른 나뭇가지가 꺾이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철제 금속음이 들려왔다.
사냥꾼의 눈에는 거친 수풀 사이로 일렁이는 푸르고 어두운 덩어리가 그저 웅크린 노루의 등덜미로 보였을 터였다.
탕 –
귓가를 울리는 파열음이 한낮의 평온을 갈랐다. 매캐한 화약 냄새가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지기도 전, 여을의 작은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가는 산길 바닥으로 툭, 꺾여 내렸다. 비명조차 섞이지 못한 정적이 고요한 숲을 무겁게 짓눌렀다.
결의 시야가 하얗게 빛바랬다. 공기가 얼어붙는 듯한 감각 속에서, 결의 눈동자에는 오직 쓰러진 여을과 그 품에서 터져 나간 푸른 꽃잎들만이 가득 차올랐다. 푸름과 붉음이 한데 섞여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것이 결은 제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없었다.
— 여을 ···.
결이 어느샌가 입을 뗀 순간이었다.
만개한 꽃잎이,
심장 사이로 부스러지는 꽃망울이
혈향과 함께 울컥이며 와르르 쏟아져내렸다.
핏기에 젖어 연붉은 색을 띄는 꽃을 보았다.
바닥을 적시고 타오르는 붉음이
흐드러지게 핀 수국 묶음을 물들여 간다.
여을이 제게 다가온 결의 손을 맞잡으며 말을 붙였다.
— 사랑을 미안함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건 슬
픈 일이야.
그새 짙어진 핏자국이 서서히 번져갔다.
— 결. 너도 영원을 믿어?
··· 그렇다면 잊어버려 줘.
결은 그제서야 시야가 뿌옇게 채워진 것을 알아차리고는 급히 눈앞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
무르녹은 햇살 아래 산길에 엎어진 채로도 여을은
희고 푸른 –
붊음이 퍼져나가던 꽃을 품안에 안고 있었다.
켜켜이 조각처럼 잘려나가는 세상 속에서
아름답기만 한 것을 여을은 놓아줄 수가 없었을 것이다.
···
도저히 미화할 수 없는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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