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14 16:25•조회 64•댓글 3•zZŽ
어둠이 걷히지 않은 새벽, 공기는 마치 차가운 강물처럼 폐부를 파고들었다. 켜 놓은 스탠드만이 좁은 작업실의 풍경을 희미하게 비출 뿐, 그림자를 머금은 붓과 물감들은 그저 죽어있는 색채 같았다. 내 마음속의 열정은 이미 오래전부터 잿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예술? 그건 취미로 해. 당장 생활부터 안정시켜야지.”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던져진 그 차가운 조언들은 꿈속에서도 나를 따라다녔다.
“너의 재능은… 음, 여기까지인 것 같네.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게 어떻겠어?”
나를 아낀다며 건넨 위로 속엔 칼날이 숨어 있었다. 인정받지 못해 주저앉았던 셀 수 없는 순간들. 그 무심한 눈빛들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내게서 꿈을 앗아간 그들이, 견딜 수 없이 원망스러웠다.
한때는 그저 영감이 마른 탓이라 여겼다.
창작의 길에서 잠시 헤매는 시간이라고, 언젠가는 다시 붓을 잡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깊은 절망은 착각이었다.
나는 이미 예술이 아닌, 먹고사는 일상의 무게에 눌려 있었다.
캔버스 위에 나만의 색을 펼치던 기쁨 대신,
생계를 위한 선택만이 나를 이끌고 있었다.
내가 알던 세상은 이미 낯선 곳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였다.
오래된 서랍 속, 덮개조차 없는 상자를 꺼냈다. 손끝이 저릿할 정도로 시렸다.
십 년 전, 온 마음을 다해 그리기 시작했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한 미완의 풍경화. 내 모든 젊음과 열정이 담겨 있던, 그야말로 내 삶 그 자체였다. 스탠드의 빛은 색 바랜 유화 위에서 차갑게 부서지고 있었다.
“어떤 벽 앞에서 멈춰야 할지 모른 채, 그저 좋다고 달려왔던 나의 청춘이 이렇게 끝날 줄은…”
울컥하는 감정에 목이 메었다. 캔버스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붓을 찾아 거칠게 움켜쥐었다. 분노가 가슴을 휘저으며 불길처럼 타올랐다.
“도대체 왜, 내 꿈 하나 때문에 이렇게 비참해져야 하는데!”
붓을 든 손에 경련이 일었다.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망가진 것은 그림이 아니었다. 그림 속에 살던 나의 순수한 열정, 그 모든 것이었다.
모든 희망은 허상이었다. 내 세상, 내 자아는 산산조각 난 채 여기 버려져 있었다.
덜컥, 낡은 캔버스는 이젤에서 떨어져 작업실 바닥에 처박혔다. 미처 굳지 못한 유화 물감이 스미고, 서서히 찢겨나간 자리에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파고들었다.
작품이 바닥에 처박히던 순간, 나의 마지막 자존심도 함께 부서지는 듯했다.
나는 처절하게 소리 지르며 무너져 내렸다.
어둠만이 나의 고통을 삼킬 뿐, 아무것도 답해주지 않았다.
정신없이 흐트러진 작업실 안, 차가운 공기만이 나의 부서진 꿈을 말없이 감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