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 위에 첫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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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08 21:45조회 163댓글 19익애
찬 공기가 스며드는 교실 창가에 앉아 있었다. 하얗게 변한 입김이 창문을 뿌옇게 물들였다. 17살의 겨울은 모든 것이 얼어붙은 듯 정적이었다. 나른한 오후, 칠판의 분필 소리마저 멀리 들려올 때였다. 그 애가 창밖을 쳐다보다가 문득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짧게 마주친 눈빛. 시선이 얽히는 찰나. 내 심장이 딱 한 박자 빠르게 뛰었다.

첫 설렘은 그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왔다.

쉬는 시간 복도 끝 창문에 기대어 그 애가 친구들과 웃고 있었다. 코 끝이 빨개졌고 귀 끝도 살짝 물들어 있었다. 무심코 바라본 내 시선이 닿았는지 그 애가 눈을 마주쳤다.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려는데 그 애가 활짝 웃었다.

그 웃음 한 번에 꽁꽁 얼어붙었던 내 마음에 따스한 햇살이 스며드는 듯했다. 발끝에서부터 피어나는 간지러움. 복도를 따라 멀어져 가는 그 애의 뒷모습에서 나는 처음으로 겨울 속에서 봄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방과 후의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듯 잔뜩 흐려 있었다. 두터운 목도리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그 애가 불쑥 나타났다.

― 집에 가?

평범한 인사말인데도 귓가에 맴돌았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평범한 버스 노선에 새삼스레 시선이 갔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버스 문이 열렸다. 서로 마주 보며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한 칸 떨어진 채 나란히 서서 각자의 이어폰을 꽂았지만 어쩐지 같은 노랫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버스는 창밖으로 조용하고 찬찬히 내리는 눈발을 헤치며 느릿하게 달렸다. 창문 밖 풍경은 하얀 그림처럼 지나갔다. 무릎 위에 놓인 가방 위로 내린 창밖의 희미한 불빛이 반짝였다. 툭. 뭔가 가방 위로 떨어졌다.

아, 눈이다. 첫눈.

나는 가만히 그 작은 눈송이를 바라봤다. 하얀 요정처럼 부서질 듯 작았다. 그때였다. 그 애가 몸을 살짝 기울여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그리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 첫눈이네.

그 애의 어깨에도 소복이 눈이 쌓였다. 나는 가만히 팔을 뻗어 그의 어깨에 얹힌 작은 눈송이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차갑고 부드러웠다. 그 애가 나를 돌아보며 살짝 놀란 눈으로 눈을 크게 떴다. 순간 코끝이 찡했다. 창밖에서 반짝이던 불빛이 그의 눈동자에 별처럼 박혔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버스 안의 모든 소리가 아득해졌다. 오직 서로의 숨소리만이 들리는 듯했다. 차갑게 식어가는 버스 손잡이. 그 애의 어깨 위로 떨어지던 첫눈. 그리고 이 모든 순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나의 떨리는 마음.

우리의 첫눈은 그렇게 서로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설렘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저 그 따스한 눈빛 속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희미하게 웃었다. 버스가 다음 정류장에 섰다. 그 애가 먼저 일어섰다. 우리는 마지막 눈송이를 남겨둔 채 다음 설렘을 약속하듯 그렇게 스쳐 지나갔다.

여전히 따스한 겨울바람처럼.




✒ || 익애 || 첫눈 위에 새긴 첫사랑의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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