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은 푸른 상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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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19 02:22조회 103댓글 2한고요
첫사랑은 푸른 상처만 남기고 떠났다.

그 애를 처음 본 날도, 마지막으로 마주친 날도 계절은 여름이었다. 햇빛은 늘 잔인하게 투명했고, 교실에 스며들던 바람은 유난히 숨이 길었다. 나는 그 애가 웃을 때마다 세상이 잠깐 휘청거린다고 믿었다. 그 착각이 얼마나 오래도록 내 삶의 중심을 파먹을 줄은 미처 몰랐다.

푸른 상처란 말은 원래 멍에서 왔다지. 금세 피 흘리며 아파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티를 낼 수도 없는 상태. 겉으론 멀쩡해 보이지만 살짝만 눌러도 통증이 기척 없이 번져간다. 그 애는 내게 그런 사람이었다. 이름 하나에도 심장이 내려앉았고, 사소한 말투 하나에도 하루가 뒤틀렸다. 좋아한다는 말은 끝끝내 입 밖에 내지 못했으면서도, 온몸이 그 사람을 향해 기울어 있었다.

떠난다는 예고조차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수십 번의 조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모른 척했을 뿐이다. 교차되는 눈길이 줄어들던 그 시기, 전화에 답장이 늦어지고 목소리가 점점 단정해지던 그 며칠. 그때마다 느꼈던 불길함은 설마라는 말로 눌러 담겼다. 우리는 늘 잘 있던 사이처럼 굴었지만, 사실상 균열은 조용히 끝까지 번져 있었다.

떠난 뒤의 세계는 원래 있던 것과 닮아 있으면서도 미세하게 색이 바래 있었다. 책상은 똑같은 나무결이었고, 교복은 전과 다름없이 구겨졌지만, 어쩐지 모든 사물이 누군가의 그림자가 빠진 채 놓여 있는 듯 어색했다. 사람들은 다 괜찮냐고 물었다. 괜찮다고 답하지 않으면 내가 나를 버릴 것 같아서 억지로 괜찮다고 말했다. 말하는 순간마다 목구멍에서는 거짓이 잘게 조각나 살을 긁었다.

시간이 지나면 무뎌진다던 위로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무뎌지는 건 감정이 아니라 목소리였다. 상처는 여전히 푸른 기운을 띤 채 내 안 어딘가에 눌려 있었고, 나는 그것을 껴안은 채 자라버렸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은 흐려지지만, 상처의 온도는 더 선명해지는 이상한 역설 속에서.

가끔 그런 생각도 한다. 그 애가 떠난 것이 아니라, 내가 멈춘 게 아닐까 하고. 어쩌면 나는 지금도 여름의 뒷자락 언저리에 앉아, 떠나는 뒷모습을 되풀이 감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 애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복잡한 감정보다 먼저 떠오르는 건, 이상하게도 빛바랜 하늘색이다. 차갑게 식은 물기, 아직 마르지 않은 멍자국, 오래된 노트에 번져 있던 잉크 같은 색.

그래서일까. 언젠가 누군가가 내게 첫사랑이 뭐였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 이렇게 답할 것이다.
이름도, 계절도, 결말도 아닌 단 하나의 색이었다고.
그리고 그 색은 아직도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은 상처의 형태로 숨 쉬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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