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겨진 마지막 열병은 순애
| 소녀 필독
그 크리스마스에 본 공포 영화는 재미가 없었다. 7번 방의 선물이나 다시 보자고 말을 했던 것 같다. 크리스마스 당일 저녁이라 어렵게 예매했는데 이런 이야기나 하고 있으니 웃겼다. 백화점을 빠져나와 조금 걸어 복작한 거리로 가니 새삼스럽게 크리스마스라는 게 실감이 났다. 붐비는 사람과 화려한 조명들이 거리를 감싸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부산이라 눈이 오지는 않았지만 옆에 하지우가 있어서 충분히 질퍽였다.
질퍽질퍽질퍽질퍽질퍽질퍽질퍽······.
가게마다 달린 네온 사인들과 크리스마스 트리들이 반짝였다. 날씨가 추워서 너와 내 얼굴에 붉은 홍조가 빙화 氷花 처럼 번졌다. 시끄러운 사람들 사이에서 고요하게 물든 우리가 유하게 무너진다. 계절이 지날수록 더해지는 열병이자 사랑, 익애 益愛 가 너를 적셨고 그 순간에도 나는 너에게 서서히 익애 溺愛 되고 있었다. 너의 사랑은 지나가는 계절에 계속 더해졌고 나는 너에게 점점 빠져들고 있었으니. 우리의 다정했던 계절은 익애였다. 붉게 물든 네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던 그 겨울. 사랑스러운 네 얼굴은 그 순간에도 사랑을 노래했다. 작은 웃음이 반짝였다. 우리의 한없이 충분한 밤. 우리의 소야 素夜 는 서로였다.
아늑한 분위기의 가게는 모두 들어갔다. 진열된 소품은 거기서 거기였지만. 주로 오르골이나 스노우볼, 각양각색의 키링과 사탕들. 산타 모자나 루돌프 머리띠도 있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흔들어 보고 또 들어보고 만지작거렸다. 머리에 장식을 꽃은 서로를 보고 웃었다. 길거리 버스킹을 보고 눈을 마주보며 리듬을 타기도 했다. 사랑스러운 17살. 나는 그 때 이 겨울에게 사랑에 빠진 건 아닐까.
- 지금이 영원하면 좋겠다.
- 그런 게 어딨냐?
- 봄은 다시 돌아올거야.
어떤 어둠도, 어떤 계절도 영원할 순 없으니까. 지금의 눈꽃은 계속 떨어지고 멀어지겠지. 보고싶다. 기다리면 네기 다시 여기로 올까. 나에게 널 잃는다는 가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겨울은 더 이상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았기에 너무나 당연하게 영원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니 그런 멍청한 착각을 하며 네 곁에 남았겠지.
그게 결코 사랑이라 알아채지 못하고.
질퍽질퍽순애
널 처음 본, 그러니까 하지우를 처음 본 여름에도. 그리고 네가 아팠던 겨울에도. 바닥에 잔뜩 눌러붙은 낙엽을 밟으며 나란히 걸었던 가을에도. 떨어지는 벚꽃을 손으로 잡아 너에게 건넨 봄에도 나는 널 사랑했는데. 왜인지 모르게 우는 널 보면 마음이 쓰렸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척 널 봤다. 그래서 나는 끝까지 네가 바다에서 왜 울었는 지 알지 못했다. 그 여름에 밤바다의 바다보다 더 짠 눈물이 우리를 적셨고 물이 모두 말라도 짠 맛이 났다. 우리의 짜고 달았던 여름아, 그저 우리 안에서 조용히 빛나 줘. 영원히.
하지우와 이은채의 17살은 모든 계절이 따뜻했다. 심지어 12월이 끝나가는 한 겨울 밤에도 그저 서로가 옆에 있다는 아유로 춥지 않았다. 그 날은 하루종일 내 몸에서 네가 준 향수 냄새가 났다. 그리고 네 손목에는 쇠 냄새가 났다. 모든 절망을 뒤로 버리고 시린 따스함을 만끽한 우리의 겨울은 온통 모순이었다.
겨울은 길었다. 그 긴 겨울, 나는 모든 순간에 너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봄에 내리는 눈송이처럼 조용하지만 선명히. 겨울에도 벚꽃이 피어났다. 흐르지 못한 눈물과 함께 그 날 너에게 받은 향수가 하늘을 탁하게 채우고 눈이 되어 내렸다. 죽은 너를 향한 향수 鄕愁 가, 봄도 아닌데 꽃 향이 너와 나를 그리고 또 사방을, 마침내 세상을 가득 채웠다. 너는 내 세상이니까.
나는 아직 너라는 계절을 기억했고 또 그리웠으며 원망했다. 그 감정의 끝에 눈물이 있었다. 네가 밤바다에서 울었던 것처럼, 네가 나 때문에 울었을 많은 밤처럼 울었다. 나의 유알무이한 계절, 하지우에게 사무친 눈물을 흘렸다. 다신 돌아오지 않을 하지우를 떠올리며 울었다.
내가 너를 이제야 사랑했기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 너를 기다린만큼, 어쩌면 그것보다 더, 과장하자면 영원히 널 기다릴 수 있는데. 왠지 난 지금이 우리의 마지막 계절일 것 같아. 믿을 수 없지만 돌아오지 않을 계절. 우린 왜 처음부터 달랐을까. 이은채는 왜 이제야 하지우를 사랑했고 하지우는 왜 이은채를 사랑했을까. 왜 이제 너는 없을까. 나는 기어코 또 다음을 바랄 수 밖에 없었다. 이제는 너와 함께할 다음을. 엉원히.
―
19살 이은채는 사람이 밀려 들어오던 샵에서 퇴근해 자취방 침대에 누웠다. 씨바알― 존나 피곤하다. 친구들은 수능이 끝나고 백수의 삶을 누리고 있는 반면 이은채는 올해 초부터 일한 샵에서 매일을 죽어가고 있다. 공부나 했어야 핬다고 한탄하며 정신없이 일한 이은채는 어느새 제법 그럴싸한 손짓으로 얼굴을 만질 수 있게 되었다. 연말에는 일이 더 많았다. 놀랍게도, 이은채는 1시간 뒤 20살이 된다.
11시 58분
새해를 맞이하며 누군가에게 -팬들, 연인, 혹은 친구들.- 잘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얼굴에 정신없이 메이크업을 하다 보니 술 약속도, 만날 친구도 없었다. 잠이나 자자고 다짐하며 울리는 단톡방 알람을 껐다.
11시 59분
어쩌다 내가 20살이 되었을까. 앞 날은 그닥 걱정되지 않았다. 일찍부터 돈을 벌고 있었고 죽어라 일만 한 만큼 실력도 이젠 알아줄 정도니깐. 이대로 조금만 더 지나면 이은채는 어엿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은채는 이 겨울에도, 눈이 내리는 서울 한복판에서도 여전히 더웠던 부산에 잠식되어 살았다. 지키지 못한 네 얼굴을 떠올리며 마지막 19살을 만끽했다. 네가 옆에 있다면 어땠을까. 네가 죽지 않았어도 난 널 사랑할까. 창 밖에 눈이 펑펑 내렸다. 부산에서의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풍경.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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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르륵―
촤르륵촤르륵촤르륵촤르륵촤르륵촤르륵
촤르륵촤르륵촤르륵촤르륵촤르륵촤르륵
촤르륵촤르륵촤르륵촤르륵촤르륵촤르륵
이은차는 누구인가? 하지우는 누구인가? 순간 이은채의 머리로 밀려오는 진득한 기억의 파편들. 이은채는 그곳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꿈인가? 언젠가 본 영화의 내용인가? 피 냄새가 나. 탕탕탕. 울리는 총성. 우리는 운명인가? 우리의 처음은 이번인가? 우리의 시작은 어디인가? 이 끔찍한 인연은 시작이. 아―
- 이율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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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01 봄날 - 방탄소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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