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면 지워지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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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7 17:09조회 76댓글 7RIZZ
#1. 소나기인 줄 알았던


그해 여름은 유독 지독했다. 기상청에서는 연일 역대급 장마가 시작될 거라는 경고를 쏟아냈고, 뉴스에서는 습도와 불쾌지수가 최고조에 달했다는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교실 안은 낡은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었지만,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끈적한 공기까지 막아주지는 못했다. 숨을 쉴 때마다 허파 가득 물기를 머금은 공기가 차오르는 것 같은, 그런 축축한 계절의 한복판이었다.

나는 그 계절을 혐오했다. 옷이 살결에 달라붙는 느낌도, 신발 밑창이 찌걱거리는 소리도 전부 끔찍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가장 눅눅하게 만드는 건, 교실 창가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 한 소년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은 이상현.

이상현은 반에서 그리 존재감이 도드라지는 아이가 아니었다. 늘 조용히 책을 읽거나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는 게 전부인 평범한 남자아이. 하지만 내 시선은 언제나 기상청 예보관이라도 된 것처럼 이상현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를 쫓고 있었다. 그 애가 교과서 페이지를 넘기는 나른한 손짓, 더운지 교복 셔츠 깃을 펄럭이는 행동, 가끔 창밖을 보며 짓는 옅은 미소까지. 그 모든 풍경이 내 마음에 빗방울처럼 뚝뚝 떨어져 번지고 있었다. 그건 완벽한 짝사랑이었다. 시작도 알 수 없고, 끝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장마를 닮은 지독한 짝사랑.

“야, 오늘 비 진짜 미쳤다. 하늘 구멍 뚫린 거 아니야?”

종례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창문 밖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창밖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맑았던 하늘이 순식간에 먹구름으로 뒤덮이더니, 마치 하늘에서 양동이로 물을 퍼붓듯 거센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운동장은 순식간에 거대한 흙탕물 바다로 변해갔다.

아이들은 우산을 펼치며 하나둘 교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가방을 멘 채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침에 분명 일기예보를 확인했는데도 귀찮다는 이유로 우산을 챙기지 않은 내 자신을 탓해봐야 이미 늦은 후였다. 사물함을 아무리 뒤져봐도 먼지 쌓인 체육복 바지만 나올 뿐, 비를 막아줄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맞고 뛰어갈까.’

단 1분만 서 있어도 온몸이 생쥐처럼 젖어버릴 게 뻔한 폭우였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가방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교실 문을 나섰다. 중앙 현관 앞에는 나처럼 우산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몇몇 아이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거센 빗줄기가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혀 사방으로 튀었고, 서늘한 빗물 안개가 현관 안쪽까지 밀려들었다.

팔짱을 낀 채 빗소리를 들으며 언제쯤 이 비가 가늘어질지 멍하니 타일 바닥만 바라보고 있던 그때였다.

“우산 없어?”

낮고 담담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친 이상현이 서 있었다. 이상현의 손에는 짙은 남색 장우산 하나가 들려 있었다. 평소에 말 한마디 제대로 섞어본 적 없는 짝사랑 상대가 바로 곁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현실에,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빗소리가 순간적으로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어? 어…… 아침에 깜빡하고 안 가져왔어. 너는 집에 가려고?”

“응. 가야지.”

이상현은 무덤덤하게 대답하며 장우산을 앞으로 내밀었다. 버튼을 누르자 탁-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커다란 남색 천이 사방으로 펼쳐졌다. 그 우산이 만들어낸 작은 그늘이 왠지 모르게 아늑해 보였다.

이상현은 빗속으로 한 걸음 먼저 발을 내딛더니, 몸을 돌려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비가 우산 머리 위로 거칠게 쏟아지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같이 쓰자. 방향 비슷하잖아.”

“아, 아냐! 나 그냥 비 좀 맞고 뛰어가면 돼! 너 불편하잖아.”

당황해서 손사래를 치는 나를 보며 이상현은 아주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 예뻐서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이 비 다 맞고 가면 내일 학교 못 와. 감기 걸려. 빨라 와, 씌워줄 때.”

그 말에 자석에 이끌리듯 내 발걸음이 이상현의 우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산 속의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좁았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이상현의 어깨와 내 어깨가 닿을 듯 말 듯 스쳐 지나갔고, 그 애의 은은한 섬유유연제 향기가 빗물 냄새 틈새로 훅 끼쳐왔다.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혹시 우산에 부딪히는 빗소리를 뚫고 이상현에게 들리지는 않을까 두려워 가슴을 잔뜩 웅크렸다.

쿵, 쿵, 쿵. 빗소리보다 더 거세게 뛰는 내 심장 박동을 숨기려 나는 일부러 먼 땅바닥만 보며 걸었다.

“……하늘에 구멍이 난 것 같네.”

이상현이 적막을 깨고 툭 던지듯 말했다. 우산 손잡이를 잡은 그 애의 손가락 끝이 빗물에 살짝 젖어 있었다.

“그러게. 이번 장마는 되게 길고 엄청 많이 내릴 거래. 기상청에서 그러더라.”

“장마라……”

이상현은 그 단어를 입안에서 천천히 굴리듯 읊조렸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밤하늘처럼 어두운 먹구름을 올려다보았다. 그 옆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그 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너는 비 오는 거 싫어해?”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이상현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똑바로 마주해왔다. 그 깊고 가라앉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은 묘한 떨림이 일었다.

“싫어해. 아주 많이.”

“왜? 눅눅해서?”

“아니.”

이상현은 우산을 내 쪽으로 조금 더 기울여주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비가 내리면, 세상에 있는 모든 소중한 것들이 다 녹아서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거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때의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라 그런 생각을 하나 보다, 하고 넘겼을 뿐이었다. 이상현의 한쪽 어깨가 쏟아지는 장대비에 완전히 젖어 들어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나는 그 좁은 우산 속에서 이상현과 함께 걷는 이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내 마음에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한 이 짝사랑이라는 장마가, 훗날 어떤 지독한 결말을 데려올지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소나기인 줄 알았던 우리의 장마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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