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04 10:57•조회 30•댓글 0•도경
긴 강산을 건너며 수많은 피를 봤다.
창끝에 스친 목숨이 얼마였는지, 이제는 헤아림조차 허망했다. 허나 그 모든 피바람 속에서도 내 마음을 적신 것은 오직 그대뿐이였다. 사랑이라 불렀으되, 이는 곧 피의 맹세였다.
그대를 안기 위하여라면 천 명의 목숨쯤 어찌 아까우겠습니까. 칼이 부러지고, 내 살이 찢겨 나가도 그대만은 내 곁에 묶어 둘 것이다.
하루하루 나는 원망하오.
세상이 우리를 갈라놓은 것을, 하늘조차 그대를 내어주지 않은 것을. 허나 그 원망조차 피가 되어 내 심장 속을 굽이치며 흘렀다.
그대여, 피 위에 서서 나를 보아주오.
꽃은 지고, 별은 꺼질지라도, 핏빛 강물은 영원히 흐를 것이니.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가 되기를.
그러하니 이제, 피와 운명으로써 그대를 내 곁에 묶어둘 것이다. 그게 내가 살아온 이유이자, 끝내 걸어갈 길이니. 밤하늘에 흩어진 별빛이 천만 번 꺼졌다 켜졌어도, 그대의 이름은 내 입술에서 서서히 닳아 없어져 버렸다.
사랑이라 불렀으나, 이제는 허무의 다른 이름일 뿐.
그대의 손길은 기억에서 삭아내려, 무덤 속 해골처럼 형체만 남아버렸다. 그러하건만, 참으로 기이하구나.잊으려 할수록 더욱 선명해져버리니, 망각이 곧 집착이 되어버렸다.
원망할 이름조차 사라졌으므로.
그리하여 나는 깨달았다.
사랑의 끝은 이별이 아니요, 망각 또한 아니며,
오히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 계속 살아야 하는 형벌이란 것을.
그러하니 이제 나는 혈애라 이름 붙은 이 길을 따르리라. 기억하지 못할 그대를 위해 울지도 못한 채, 허무의 무게를 짊어진 채,
끝없는 생애를 홀로 걸어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