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잔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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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28 22:10조회 133댓글 13익애
바람이 산산하게 부는 어느 오후였다. 볕은 따뜻했지만, 그 온기는 내게 스며들지 못하고 허공에 흩어지는 것 같았다. 병실 창밖으로 보이는 흔들리는 나뭇잎들처럼, 내 시간도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중이었다.

손가락 끝으로 창틀에 앉은 먼지를 스윽 닦아냈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는데도 어쩐지 힘이 부쳤다. 며칠 전부터 꿈이 부쩍 많아졌다. 생생한 색감의 꿈속에서는 왜인지 내가 너무 건강해서, 오히려 잠에서 깨면 더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누군가는 죽기 전에 주마등처럼 삶이 스쳐 지나간다고 했다는데, 나는 요즘 매일의 순간들이, 찰나의 햇살 한 조각마저도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마 마지막이라서 그런 거겠지.

컵에 담긴 차 한 모금에도 세상 모든 향이 농축된 듯 진했고,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엔 쨍한 여름의 푸르름이 담겨 있었다. 모든 것이, 예전에는 무심했던 모든 순간들이, 이제는 그토록 애틋해지는 순간이었다.

이 산산한 바람마저도,

내 곁을 잠시 머물다 이내 영원히 떠나갈 예고 같았다.

간호사 아주머니는 익숙하게 내 팔에 주삿바늘을 놓았다. 통증보다는 무감각에 가까운 감각. 내 몸의 한 조각이 나를 떠나고 있음을 매 순간 알려주는 증거 같았다.

"오늘 날씨 참 좋죠?"

아주머니는 늘 그랬듯이 짧게 말을 건넸지만 나는 그저 미소 지을 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대답할 힘이 없는 것보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삼켜버린 내 안의 말들이 차오르기 때문이었다. 지나온 시간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다.

떠들썩했던 첫 입학식, 쨍한 햇살 아래 친구들과 뛰놀던 운동장에서 늦은 밤까지 별을 보며 나누던 시시껄렁한 이야기들.

그리고 감히 마지막까지 보지 못할까 봐 애써 외면해왔고 따뜻했던 그 사람의 얼굴. 모든 기억들이 갑자기 더 선명해지고, 그 속의 감정들은 더욱 짙어졌다. 어쩌면 살아있는 모든 이들이 내게 주는 마지막 선물 같은 건 아닐까.

너무 짧아서 아쉽지만, 그래서 더 밀도 높게 모든 것을 느끼게 해주는 이별의 예행연습 같은 것. 이제는 슬픔조차도 희미한 안개처럼 느껴졌다. 단지 내 속에서 서서히 차오르는 어떤 고요함. 모든 것이 괜찮다고 그렇게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창밖을 다시 바라보니,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이 꼭 작은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것 같았다. 그래, 언젠가 올 이 순간을 애써 피하려고만 했던 내가 참 어리석었지. 이제는 알았다. 진정한 슬픔은 감당할 수 없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너무 평화로워 감히 울 수도 없을 때 찾아온다는 것을.

먼 곳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종소리,

그리고 나른하게 스며드는 햇살이

나의 마지막 오후를 완성하고 있었다.




✒ || 익애 || 주마등처럼 지나간 내 추억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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