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03 11:21•조회 96•댓글 1•양천리
- 대세수수부수[세수하고 양치]해.
화의가 의자를 당겨 측간[화장실]으로 등을 떠민다.
- 천야도 초려[걱정]하겠다. 그만 눈물 아니 흘리고.
용려[걱정]하는 천야를 생각하니 또 눈물이 치솟는다. 화의도 고작 천야의 전 애인이면서, 천야가 걱정되지는 않는 겔까.
- 야장의[잠옷] 어디에 놔?
화의가 수지[손가락]로 한 곳을 가리킨다.
- 천야 사진 밑.
빨래 소쿠리[바구니]는 천야 사진 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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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야야, 널 연모해.
알리움 같은 이 사랑을 어떻게 함부로 치워낼 수 있었겠어. 설령 이 슬픔이 행복으로 향하는 아네모네라도, 에리카는 어쩔 수 없겠지.
- 생명은 왜 고귀할까, 천야야. 살인은 왜 죄악일까. 모두 그저 흔하게 태어나는 생물체 중 하나 아닐까? 만약에 내가 널 해치면 너도 날 미워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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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잔해들이 쏟아진 물처럼 흘러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지금의 난 누구지? 천야가 누구였더라? 천야를 내가 언제 만났지? 이 녹슬지 않는 조개껍데기 같은 사랑은, 대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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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 멈춰.
화의가 오른손으로 두 눈을 가린다. 기억이 무슨 책이라도 되는 양, 손으로 눈을 덮자마자 기억이 뚝 끊겼다. 천야는 누구였지. 지금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 눈 앞엔 머리를 덮수룩이 기른 모습의 화의가, 그저 내 등을 토닥거리고 있다.
- 화, 화의야... 천야가 누구였지. 천야, 천야.
대체 이 기억은 무엇인가. 이 생생한 기억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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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예[새벽의 무지개]가 예쁘다.
화의가 가만히 옆구리에 손을 올려 안는다. 사냇놈 둘이 이리 끈적하게 있는 것을 누군가라도 봤다라면 치를 떨었겠지. 천야... 처럼.
- 화의야, 내 청연[맑은 인연]은 네냐, 천야냐.
화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다만 가희[아름다운 햇빛]를 바라보며 신예처럼 미소지었다.
- 새청아, 몽중몽을 아느냐. 꿈 속의 꿈이라는 뜻으로, 이 세상이 덧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네가 꾼 꿈은 필시 혹애[끔찍이 사랑함]하는 누군가를 실재에 그리고 싶어서 나타난 거다.
아직 시샘달[2월]의 추위가 가시지 않아서 화의가 가만 안아주는 걸론 고독이 해결되지 않는다. 분명 화의가 꽉 안아주지 않아서다. 분명이다.
- 나의 시클라멘...
- 천야는 괴사[알 수 없는 원인으로 죽다], 요절[젊은 나이에 죽다] 했다. 그만 물어보고 어여 볕이나 쫴.
여은[곱고 온화함]한 화의의 얼굴. 천야도 분명 이래 예뻤을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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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동[얼굴이 예쁘게 생긴 사내아이]아, 일어나 봐. 나야, 천야.
오늘은 천야를 빙자한 사람이 나왔다. 이렇게라도 널 마주볼 수 있어서 기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