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지게 가난했다. 5년 전 이은채에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을 코앞에서 볼 수 있는 반지하는 여름엔 더웠고 겨울엔 추웠다. 비라도 넘치게 오는 날이면 창문을 아무리 꽉 닫아도 틈으로 물이 흘렀다. 장마 내내 정말 지옥같았다. 곰팡이는 너무 당연한 수순이었고 습해서 숨을 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질퍽질퍽질퍽질퍽질퍽질퍽질퍽······.
중학교에 입학하고 첫 여름을 맞을 때였다. 교복이 있어서 가난이 묻은 옷을 입을 일은 피했지만 몸에 새겨진 곰팡이 냄새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매일 아침 청유 중학교로 향하는 길에 올리브영에서 진한 향수를 몸에 뿌렸다. 죄송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곰팡이 냄새에 눈가를 찌푸리는 친구들을 보면 정말 죽고싶을 것 같으니깐. 하루에도 자주 그 생각을 했다. 절망스러운 봄은 그렇게 흘렀고 기어코 여름이 왔다. 나의 여름이.
그 여름에 하지우가 전학왔다. 반듯히 각 잡힌 교복에 드라이로 간단히 만진 듯 차분히 흩날리는 머리. 마른 편이지만 셔츠 뒤로 드러나는 다부진 몸은 나와 다르게 전혀 볼품없어 보이지 않았다. 웃을 때 눈꼬리가 예쁘게 휘어지는 너는 괜히 날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너는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다가오는 질문들에는 스스럼없이 대답하다 혼자 있을 때는 조용히 폰을 만졌다. 학교에서는 재벌 2세라느니, 연습생이라느니, 사실 조직에 소속된 깡패 아버지의 아들이라느니··· 중학생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소문들은 주제도 모르고 퍼졌다.
비가 내린 여름에 우산을 가지고 집 근처 작은 카페로 향했다. 아빠가 지금 어디서 택배를 나르고 있을 지 가늠했다. 엄마는 새벽부터 공장에서 작업을 하다 이제야 카페로 가서 숨을 돌리고 있을 것이다. 속에서 한숨이 나왔다. 피곤해. 카페에서 엄마한테 우산을 주고 얼음물이 담긴 컵 앞에서 멍을 때렸다. 30분이 지났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를 돌았더니 하지우가 들어왔다. 이게 무슨 경우지. 이미 쓴 후드티 모자를 더 꾹 눌렀다.
같이 들어온 여자는 하지우의 어머니로 보였다. 진짜 재벌 비슷한 게 맞긴 한 건지 하지우는 척 봐도 비싼 브랜드의 니트에 고가 시계를 차고 있었다. 음료 두 개를 시키고 조곤조곤 말을 나누던 둘은 어느새 언성이 높아졌다. 기어코 하지우는 울 것 같은 표정을 하며 카페에서 나갔다. 저기 가정사도 꽤 복잡한 것 같다. 예상치 못한 사건에 머리가 지끈거려서 자리를 떴다. 비에 젖은 바닥은 기분 나쁘게 질퍽거렸다.
집으로 온 엄마는 이미 하지우의 어머니와 친해진 것 같았다. 엄마가 일하는 카페 건물이 하지우 아버지의 소유라는 걸 듣자마자 저절로 사모님이라 부르게 된 사람. 아니 얼마나 재벌인거야. 오늘 본 사모님이 너무 슬퍼 보였다며 엄마는 또 오지랖을 부렸다. 엄마가 슬퍼서 어쩔거냐고. 사모님이 한 입도 마시지 않은 에스프레소를 버리며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는 엄마가 너무 미련했다. 그 갑작스러운 인연이 내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고 또 미치도록 미련한 여름의 시작인 줄 모르고.
질퍽질퍽순애
사모님은 카페에 자주 오셨다. 사실 자주 정도가 아니라 내가 지나가다 볼 때마다 자리를 잡고 있었다. 빈 말로 재벌이 아니었다. 매일 드는 명품백이 바뀌고 혹여나 엄마와 밥이라도 먹게 되면 평생 발 들일 일도 없을 레스토랑을 방문했다. -심지어 사주시기까지.- 둘은 항상 술을 마시고 고민을 털며 펑펑 울었다. 하지우와 가까운 사이가 아닌데 하지우 집안의 일을 속속히 알게 되었다.
사모님의 고민은 거의 다 하지우의 아버지, 그러니까 회장님에 관한 것이었다. 사모님에게 들은 회장님은 멍청한 사람이었다. 폭력적이고, 감정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었고 떠나려는 사모님을 붙잡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다정한 사모님에게 항상 상처를 입히는 회장님이 미웠다. 우리 엄마의 고민은 내가 어려서부터 지겹게 들은 이야기였다. 그깟 예술을 하지 말걸. 아름다운 경지에 닿으려 하지 말걸.
엄마와 아빠는 작은 발레단에서 만났다. 그 바닥이 그렇듯 금방 망했고, 이미 사랑해버린 둘에게 남은 건 서로였으니 앞으로는 생각도 하지 않고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엄마는 그 사랑을 원망했다. 멍청한 사랑을 원망했다. 엄마는 청춘을 원망했다. 무대 위로 날리던 그 꿈은 이제 추억으로도 남지 못했다. 엄마의 그 찬란헸던 꿈이 후회로 물들 지 않도록, 흑백이 된 청춘에 색을 입힌 건 언제나 사모님이었다.
어느 날 단 둘이 술을 마시고 엄마가 눅눅한 반지하 집으로 돌아왔다. 만취한 엄마가 옷도 갈아입지 않고 눕는 걸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 순간 엄마 폰에 알람이 울렸다. 송금 문자? 벌써 돈이 들어올 때가 되었나 하고 연 화면에는 사모님의 이름이 있었다. 그 아래에 찍힌 차마 입으로 올릴 수 없는 숫자의 돈. 평생 가질 수 없는 돈이 우리 수중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사기인가?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는 지 모르겠다.
솔직히 고민이 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지금이라도 이 돈을 들고 도밍친다면 엄마가 더는 강도 높은 일을 밤새 할 필요도 없고 아빠가 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땀을 뚝뚝 흘릴 필요도 없다. 또, 나도 어쩌면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머리에 펼쳐진 앞으로의 행복이 너무 달콤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사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쩌면 실수가 될 수 있는 선택이 우리의 앞을 영원히 가로막을까 두려웠고 또 사모님에게 어떻게 기억될 자 두려웠다. 이미 받은 게 너무 많아서 이걸 받아버리면 더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내 전화를 받은 사모님의 목소리는 멀쩡했다. 같이 술을 마신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맑는 어조에 당황한 것도 잠시, 사모님이 하신 실수를 주저리 늘어 놓았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 뒤에 이어진 정적이 두려웠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사모님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봤어? 잘 보낸 거 맞아. 이 참에 너도 발레나 배우면 어떠니? 같은 말을 하신다. 확실히 취한 게 맞다. 다음 날 다시 물어야겠다.
대답은 같았다. 재벌들을 역시 제정신이 아니다. 그 이후 거짓말처럼 일이 술술 풀렸다. 사모님의 인맥으로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고 -흔히 낙하산이라 한다.- 받은 돈으로 이사를 결정하여 그 지겨웠던 반지하는 벋어났다. 몰락하던 이은채의 청춘은 그렇게 하루 아침에 구원받았다. 안타깝게도 이은채는 지나친 구원에 보답할 능력이 되지 못했다. 이은채가 할 수 있는 건 하지우의 곁을 맴도는 것 뿐이었다.
영원할 여름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또 그렇게 타올랐다.
―
이은채는 편지를 모두 읽고 Mp3에서 흐른 다음 노래를 들었다. 잘 모르는 노래. 익숙치 않은 가수의 목소리들이 나왔다. 그리고 익숙한 가수의 이름. 가사가 선명하게 들렸다. 생생한 한국어. 나에게 꼭 닿겠다는 듯 가사 하나하나가 이해되었다. 이은채는 영원히 그 노래를 들은 걸 후회했다. Mp3를 꺼버렸어야 했다. 노래 제목이 전하지 못한 진심이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가사가 너무 잘 들렸기 때문이다.
난 알아, 영원히 그럴 수는 없는 걸 숨어야만 하는 걸 추한 나니까. 난 두려운 걸, 초라해. 네가 너무 무서워. 우리가 무서워. 결국 너도 날 또 떠나버릴까 또 모든 걸 숨기고 널 만나러 가. 할 수 있는 건 정원에, 이 세상에, 예쁜 널 닮은 꽃을 피우고 네 곁을 영원히 지키는 것. 하지만 모순적이게 난 아직 널 원하고 있어. 어쩌면 그때, 우리가 함께했던 그 여름에 용기 내서 너의 앞에 섰더라면 지금 모든 건 달라졌을까.
난 울고 있어.
사라지고 무너진 우리의 계절에서
영원히 널 기다리며.
이은채는 그 구절을 듣는 순간 Mp3의 전원을 꺼버렸다. 그리고 영원히 다시 킬 용기를 내지 못했다. 마지막 곡이 남은 건 끝내 모른 채 하지우의 진심을 병실에 버리고 도망쳤다. 죽는 그 순간까지 이은채의 곁을 지킨 하지우의 진심은 이은채가 알기엔 너무 무거웠고 또 아팠으며 질퍽했다. 너무 질퍽해서 이은채는 그 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묶여서 하지우를 생각 할 것이다. 하지우가 이런 걸 바라진 않았겠지만.
놓을 수 없는 구원의 속삭임을
밟지 못한 날 원망해 줘.
물결이 흐르듯 너에게 가는 날 멈춰줘.
https://curious.quizby.me/ugun…^ 퇴고 없어요 더러운 흙이 잔뜩 묻어 질퍽
BGM 전하지 못한 진심 - 방탄소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