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藝術化 (예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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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07 11:56조회 48댓글 45eo1z
수없이 손목을 그었다.

귀하의 허연 피부를 가르고 붉은 피가 고개를 내민다.

길게 뻗은 혈의 무늬는 귀하가 살아오면서 본 그 어떠한 것보다 큰 위로이자 재앙이었다. 귀하는 손목을 무늬로 채워나간다. 예술이었다.

손바닥에 맺힌 땀과 희미하게 떨리는 쥐어잡은 구원은, 두려움에서 비롯한 것인지 희열에 의한 것인지 귀하는 알지 못한다.

갈라진 살갗에 휴지를 짓이긴다. 하얀 종이 뭉치에 붉은 얼룩이 스며들었다. 소량.

언젠가는 모두 붉은색으로 물들일 수 있는 날이 올까. 귀하는 두려워하면서도 그러기를 바란다.

귀하의 신념은 틀리지 않았다. 아아, 모순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

상처가 쓰라리다. 흉하게 난 가로줄은 심장에 그은 듯. 육중한 송곳을 가슴에 박은 귀하는 입꼬리를 올린다. 자신의 살아있음을 느끼는 방식이 너무나도 야만적이고 추악하다. 이렇게라도 삶을 이어가는 자신이 더럽기 그지없다.

잔잔했던 지난 바다를 떠올린다. 편히 잠들던 밤을 떠올린다. 가볍던 발걸음을 생각한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생각한다.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은 삶을 걸어왔지만 이때만큼 지독한 적은 없다. 언젠가 더 추악한 인간이 되면 지금이 아름다워질까. 귀하는 현재가 아름답고 백옥무하하길 바라지만 동시에 가장 엉망진창이길 바란다.

자연의 것처럼 우둘투둘한 손목을 훑는다. 손끝에 걸리는 감각에 송곳이 더욱 육중해진다. 귀하는 울었다.

기껏 새긴 무늬를 덕지덕지 가리면서 귀하는 동시에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누군가가 이 예술을 알아보고 속뜻을 이해하길 바라지만, 보여주기엔 부끄러운.

귀하의 예술은 언제나 그랬다.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찢어버리고 싶어질까. 지금껏 그려낸 수많은 그림처럼.

언젠가 마주칠 귀인에게만 보여주기 위해 귀하는 작품을 가린다. 어차피 바보 같은 이웃들은 이게 어떤 건지도 모르는데 가릴 필요가 있을까.

돈을 훔치는 것도 돈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고. 귀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혹시라도, 자신의 나약함이 드러날까. 귀하는 여전히 사람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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