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curious.quizby.me/zeoz…식사를 하려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나는 숟가락을 거두고 급히 문 쪽을 봤다. 그러 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기다리던 이들은 아직이었다. 깊은 한숨과 함께 입맛이 뚝 떨어졌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집어넣 지 않은 배가 곪고 있었다. 오직 살아있는 것만이 먹을 자격이 주어진다. 그곳에 있을 때부터 들어온 말이다. 그 말을 되새기며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배고프다.
다시 식사하려는데 이번엔 말이 들렸다. 처음엔 잘못 들은 거로 생각해 무시하려 했는 데, 그 소음은 어쩐지 점점 커졌다. 뒷덜미가 차가워졌다. 의자를 뒤로 빼 주변을 살폈다. 눈썹을 살짝 올리며 이곳저곳 기웃거렸다. 거실 쪽에서 났나? 아니었다. 부름은 여기저기 곳곳에 빛처럼 뻗었다. 갈라진 벽 틈 바구니에서 스며든 듯했고, 천 장의 파이프, 식탁 밑, 혹은 빵을 담은 그릇 안에서 울린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내 속이던가? 알 수 없다.
등골이 오싹해지며, 불길한 느낌이 온몸을 감싸다 벗어나려는데 하체가 말을 듣지 않았다.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빠걱거리던 다리는 그대로의 자로 움직여 털썩 앉았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적막한 부엌엔 아무것도 없다. 소리도 단순한 착각이다. 그러나 몸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꿈인가? 그렇다면 가위에 눌린 것이다. 나는 상체에 힘을 빼고 심호흡했다. 손끝이 저도 모르게 허공을 그었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봤던 성호의 잔재였다.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죽음의 순간순간마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나의 성호에 맞춰 시멘트 벽이 숨을 쉬듯 미세하게 흔들렸다. 자세히 보니 짙은 얼룩이 진 곳에 핑그리는 얼굴 여럿이 얼핏 떠오르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오래전 잊고 지낸 지독한 상처가 원망을 더했다. 이름을 알 수 없어 낯선 그것들은 눈을 감은 채 입술을 달싹였다. 근속에서 때묻은 단어가 용성였다.
“배고픈가?”
조잘거리는 것들에 나는 힘겹게 귀를 막았다. 그러나 그 말은 손바닥 사이 사이로 잉크처럼 번지더니 성호를 그은 팔을 지배했다. 그 팔은 옆으로 쭉 뻗더니 식탁을 탁! 탁! 치고는 숟가락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퍽! 퍼! 소리를 내며 입안 가득 쑤셔 넣었다. 덜 익은 고기를 씹은 것 처럼 쇳내가 번졌다. 혀끝부터 퍼져가는 그 맛은 삼킨 기억을 끄집어냈다. 잊고 지냈던 피맛이 엉겨 붙은 것이다. 반대편 손은 포크로 빨간 소스를 뿌린 고기 한 점을 쿡쿡 쑤셨다. 신경을 굵는 날카로운 소리에 저절로 눈썹이 찡그려졌 다. 나는 더욱 거칠게 포크를 휘둘렀다. 식탁이 흔들렸다. 이상하리만큼 흥분이 가라앉질 않았다. 그러나 내 의지는 아니었다.
“먹어라.”
어떤 메시지가 들리고서야 나는 동작을 멈추고 식탁 위를 바라봤다. 검은 빵 한 조각과 물은 양배추 수프, 그리고 낭자한 고기 조각들이 있었다. 차갑게 식어 군은 빵 껍질은 돌덩이처럼 단단했고, 수프에서는 가스관에서 누출된 듯한 솟내가 났다. 아니다. 이건 내가 차린 식사가 아니다. 나는 먹을 수 없다. 아무리 마음속으로 외쳐도 습관은 경솔하게 식기를 내 입으로 쑤셔 넣으려 했다.
내가 기억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무렵, 창문 너머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학교가 끝났는지, 골목길은 소란스러웠다. 소란이 멀어질 때쯤, 단단한 땅을 말처럼 우르르 짓밟고 지나가는 소리가 몇 초 동안 나더니, 짧고 날카로운 단발성 구령과 함께 솟소리가 웃음을 핏으며 고함을 질러됐다.여러 개의 불꽃이 허공을 가르며 비명과 울음을 동반했다.
괜한 소음에 괴로워하던 나의 몸뚱이는 맥없이 숟가락과 포크를 놓쳤다. 세 개의 섯덩어리가 손에서 빠져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카펫에 부딪히는 소리는 둔탁하지 않았고 어쩐지 낯익었다. 식은땀이 흐르고 숨이 막혔다.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고, 허리를 굽혀 식기를 주우려 했다. 그러나 손끝에 닿은 것은 숟가락도 포크도 아니었다. 차갑고 길고 무거운 다른 무언가였다. 그것을 움켜쥐려 하자 손아귀가 뻣뻣하게 굳었다.
“아직 배고픈가?”
이번에는 좀 더 확실히 들렸다. 바닥에서 나를 기다리는 그것의 목소리다. 아니다. 거대한 입으로 변해 배고픈 새처럼 지저귀는 건 그것이 아닌 바로이 바닥이다. 바닥이 짖는 소리에 벽지에 금이 갔고, 갈라진 틈새로 검은 연기가 꿈틀댔다. 연기는 곧 얼굴이 거울인 검은 육신으로 변해 스멀스멀 기어 내 앞까지 다가왔다.
거울 속에는 좁은 골목 어귀, 그 너머에 무릎을 끓은 채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 땅바닥을 흥건히 적신 웅덩이가 보였다. 그 웅덩이는 반사된 빛 때문에 푸르스름했으나, 곧 붉게 물들어갔다. 탄내와 피비린내가 섞인 냄새... 그때의 냄새가 코끝을 적셨다. 나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 한낱 꿈이다. 그렇게 믿었다. 살고 싶었으니까 누구보다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지금도 그렇다. 코앞에 보이는 십자가를 향해 이리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햇빛으로 그어진 십자가가 한껏 활한 빛을 내뿜자, 초점이 일그러졌다. 빛을 떨어뜨린 곳엔 창문이 있었다. 검게 그은 피부, 떨리는 눈동자, 있는 힘껏 곤봉을 내리치는 자의 얼굴이 비쳤다. 무거운 쇠줄을 걸고 얼굴에 틴 피를 닦으며 웃는 저놈은 누구인가? 그것은 인간의 웃음이 아니다. 그건 인간이 아냐. 그건 내가 아냐. 나는 정신을 놓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평범하게 공부해서 평범한 사람이... 그래서 의무를 다했다. 그 어떤 의문도 갖지 않은 채 광장에서 별이 흩뿌려 놓은 길을 따라 걸었다. 같은 모자와 같은 복장, 같은 군화를 신은 이들이 기수를 따라 줄지어 나갔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기나긴 행군이 절반쯤 다다랐을 무렵, 굉음이 뇌리를 스치며 몸을 피웠다. 화창했던 날들이 울부짖음과 함께 일순간 사그라들었다.
긴 이명의 끝에서 바라본 세상은 무엇인가 배고파서 우릴 삼킨 것처럼 더할 나위 없는 공허로 가득했다. 내 머리를 깎아 준 전우는 어디로 갔나? 담배를 나눠 피던 선임은? 그리고 내 옆자리에 있던 분대장은? 내 몸에 달라붙은 이 끈적한 건 뭐지? 다들 어디 있나?
모두 어디 있지? 먹먹해진 귀 때문일까?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고, 팔과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다. 심장이 요동쳤다. 멎은 바람 사이로 안개가 깔렸고, 그 사이사이마다 웃고 춤추며 떠드는 자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자기들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때문인가? 아니면 웃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일까? 그렇다면 나는 잘하고 있나? 생각이 행동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 대가는 무엇인가? 적군? 아군? 여기 고향을 잃지 않은 자가 어디 있나? 무엇이 살아있는 자들을 이리 만들었나? 무엇이 이곳에 온 우리를 증발시켰나? 무엇이 나를...
대체 무엇이 피와 분노를.. 이토록 타오르게 했나? 재만 남은 곳에 눈 돌릴 곳은 없다. 이제 더는 돌아갈 수 없으리라. 그런데도 기억하는 것은 단 하나. 이 나라, 나의 조국을 위하여.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몇 시간? 며칠? 몇 달? 아니, 어쩌면 몇 년일지도... 흐릿해진 눈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그림자가 눈꺼풀 아래로 절반 이상 떨어진 푸른 새벽이었다. 부억 구석엔 도모보이로 보이는 얼룩이 웅크리고 있었고, 창틀에는 까마귀 떼를 닮은 나뭇가지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나를 밀고하려는 프락치인가? 아니면 잡으러 온 사신인가? 바닥은 숙눅해졌고, 나는 엉망이 된 식탁에 앉은 채 꼼짝하지 못했다.
"죽음만도 못한 삶이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어떤 흑마법을 부르는 주문처럼 갈라진 입술 사이로 몇 번이고 새어 나왔지만, 바깥에서는 계속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이어졌다. 아이들이 사라진 자리엔 나란히 선 검은 형체 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모두 같은 키와 체형, 같은 팔, 같은 다리, 눈과 입이 사라진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나를 향해 열리고 닫혔다. 그 구멍에서 소리가 났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나는 무심코 공간을 채우는 메아리를 따라 중얼거렸다.
“배고프다.”
허기와 함께 또 다른 감각이 나를 채웠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무력감. 갚지 못한 채 남겨둔 빚은 목구멍에 돌멩이가 걸린 것처럼 나를 유린했다. 형체들은 방 안으로까지 밀고 들어와 식탁을 빙 둘러쌌다. 그들은 나를 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먹어라. 먹어라. 먹어라.”
굵주린 명령에 식탁은 다시 음식으로 꾸며졌다. 빨간 소스에 비서진 고기. 자세히 보니 말 없는 것들의 일그러진 표정이 꿈틀거렸다.
‘그만큼 집어 삼켜놓고...’
그러나 형체는 아무 말 없이 내가 행하길 기다렸다.
“이번엔 무엇을 잃으면 되오?”
라는 게 이 상황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기적인 생각은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중독된 입은 거부할 수 없으리라... 나는 포크를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기로 가져가 힘껏 내리쳤다.
“!”
그러나 차갑고 단단한 끝이 노리는 건 고기가 아니다. 내 손등이었다. 뚫어진 구멍에서 검붉은 피가 주르륵 흘렀다. 이 고통은 오로지 나만의 것. 아직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걸 알아차렸는지 형체는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얼굴은 없었지만, 기분 나빠하는 것이 느껴졌다.
“변명하고 발뺌하고 무책임하게 도망치고도 아직 살아있다니... 그 다음은?”
그들의 턱이 갈라지며 잡음과 함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목소리는 먼저 간 이들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단전을 지나 목구멍에서 쏟아졌다. 그러나 그것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버렸다. 질병과도 같은 지긋지긋한 것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달리 방법이 없다.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났다. 처음은 짧게, 두번째는 길게... 끝으로 다시 짧게. 그것은 예전부터 묵혀두고 차례를 기다리던 바람이요, 해방의 울림이었다.
‘그들이 왔다.’
주변에 빛이 들기 시작한 걸 보니 새벽을 넘긴 아침이었다. 나를 묶은 사슬 같던 마비가 거짓말처럼 풀렸다. 나는 헐레벌떡 문에 다가가 손잡이를 잡았다. 이걸 열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괜찮다. 결말은 정해진 것이 아니니까. 그저 나는 살고 싶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어쩔 수 없는 것으로부터 홀가분해지고 싶었다. 그러기에 이건 내가 결정한 최선이다.
“안녕하세요. 신문사에서 나왔습니다.”
문 앞에는 덩치 큰 사람 둘이서 있었다. 환영 아닌 진짜 목소리와 냄새다. 햇빛이 역광이라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한 명은 안경을 쓰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한 쪽 어깨에 카메라를 짊어지고 있었다. 이들을 맞이하는 나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가? 괜스레 들떠있진 않은가. 만약, 웃고 있다면 희망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고, 만약 울고 있다면 희망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