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08 22:10•조회 94•댓글 0•,
1부: 열여덟, 얼어붙은 계절에 내린 비남들보다 유난히 시린 바람이 불던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초. 늘 교실 맨 뒷자리에서 창밖만 바라보던 지우의 일상에 균열이 생겼다."윤소은이다. 잘 부탁해."선생님의 소개와 함께 교실로 걸어 들어온 소은은 유독 맑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마땅한 빈자리가 없어 지우의 바로 옆자리에 앉게 된 소은. 지우는 늘 그렇듯 헤드셋을 귀에 걸치며 주위의 소음을 차단하려 했다. 하지만 소은의 시선은 자꾸만 지우의 거칠고 긴 손가락에 머물렀다."저기, 혹시 너…… 한지우 맞아?"점심시간, 교실에 단둘만 남았을 때 소은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지우는 대답 대신 헤드셋을 한쪽만 내리며 차가운 눈빛으로 소은을 응시했다."사람 잘못 봤어."지우의 단호한 거절에도 소은은 포기하지 않았다.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오후, 우산이 없어 처마 밑에 서 있던 지우에게 소은이 다가와 노란 우산을 내밀었다."난 비 맞는 거 좋아해. 너 써."소은은 우산을 쥐여주고는 빗속으로 뛰어 나갔다. 지우는 제 손에 남겨진 온기와 멀어지는 소은의 뒷모습을 보며, 오랫동안 멈춰 있던 심장이 미세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2부: 방과 후, 낡은 피아노의 선율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진 곳은 아무도 찾지 않는 학교 구관의 낡은 음악실이었다. 우연히 비를 피해 음악실로 들어간 소은은 먼지 쌓인 피아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지우를 발견했다. 지우의 손가락은 건반 위를 맴돌 뿐, 결코 누르지 못하고 떨고 있었다."치고 싶으면 쳐도 돼. 아무도 안 보잖아."어둠 속에서 들려온 소은의 목소리에 지우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지우의 눈동자에 어린 두려움을 알아챈 소은은 다정하게 걸어와 피아노 맨 오른쪽 건반 하나를 톡, 눌렀다. 맑은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나 사실 너 알아. 3년 전 청소년 콩쿠르에서 네 연주 들었어. 그때 외할머니 돌아가시고 정말 힘들었는데, 네 음악이 날 살렸거든."소은의 솔직한 고백에 지우의 방어벽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머니의 교통사고가 자신 때문에 일어났다는 죄책감에 피아노를 버렸던 지우였다. 자신의 음악이 누군가에게 구원이었다는 사실은 지우에게 큰 충격이었다.그날 이후, 두 사람은 방과 후 음악실에서 비밀스러운 시간을 공유했다. 지우는 선율 대신 소은의 조잘거리는 일상을 들었고, 소은은 지우의 무뚝뚝함 속에 숨겨진 배려를 배웠다. 지우가 소은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다정하게 넘겨주던 날, 창문 사이로 쏟아지던 노을빛은 두 사람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3부: 상처라는 벽, 그리고 서툰 눈물행복도 잠시, 지우의 과거를 아는 예전 음악계 지인들이 학교로 찾아오면서 평화는 깨졌다. 지우가 다시 피아노를 잡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진 말들을 쏟아내는 어른들을 목격한 소은은 앞장서서 지우를 감싸 안았다."상관하지 마세요! 지우가 행복하지 않으면 연주 같은 건 아무 의미 없어요!"하지만 지우는 오히려 소은의 손치우며 차갑게 돌아섰다. 자신과 가까워지면 소은마저 불행해질지도 모른다는 뿌리 깊은 공포가 다시 그를 지배한 것이다."너를 보면 자꾸 피아노가 치고 싶어져. 그러니까 이제 내 앞에 나타나지 마."마음에 없는 모진 말로 소은을 울려 보낸 밤, 지우는 텅 빈 방에서 자신의 손을 보며 소리 없이 오열했다. 소은 역시 밤새 눈물을 흘렸지만, 지우의 눈빛 속에 담긴 슬픔이 원망보다 컸기에 그를 놓을 수 없었다.4부: 녹아내린 겨울, 함께 걷는 봄길겨울 방학이 끝나가고 3학년 개학을 앞둔 날, 소은은 지우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겼다. 편지 속에는 음악실 열쇠와 함께 작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네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게. 하지만 네 음악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다는 걸 잊지 마.]열쇠를 쥔 지우는 마침내 깨달았다. 상처를 회피하는 것은 어머니가 바란 삶이 아니며, 자신을 진심으로 믿어주는 소은의 손을 놓치는 것이야말로 평생의 후회가 되리라는 것을.지우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달려 학교 음악실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하얀 입김을 불며 지우를 기다리던 소은이 있었다. 지우는 천천히 피아노 앞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소은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미소 지었다."소은아, 네가 좋아하던 그 곡이야."지우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부드럽게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긴 침묵을 깨고 울려 퍼진 선율은 차갑게 얼어붙었던 두 사람의 겨울을 완전히 녹여내기에 충분했다. 연주가 끝나고, 지우는 소은의 떨리는 손을 꼭 맞잡았다. 서로를 향해 웃어 보이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마침내 따스한 봄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