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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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18 18:50조회 124댓글 1백도설
그날도 집은 꽤 평온했습니다.
다만, 평온이라는 말이 이렇게나
불안한 단어였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 집은 이 고장에서
손꼽히는 집안이었습니다.
곡물 창고와 양조장,
상점 몇 곳을 가지고 있었고,
집안 어른들은 늘 정치와는
거리를 두는 태도를 지켰습니다.

직접 나서지 않는 것이 지혜라고,
격랑은 지나가게 두는 것이 우아하고 지혜로운
부자의 방식이라 배웠습니다.

저는 서당에서 글을 배웠고,
신식 학교에서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오래 배운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모르는 척하는 법. 묻지 않는 법.
작은 목소리로 예의를 갖추는 법.

부잣집 귀한 딸에게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예의인 순간이 더 많았으니까요.

해방 직전의 도시는 늘 소란스러웠습니다.
학교를 가는 거리에는
거친 언어와 명령이 떠돌았고,
사람과 아이들은 충성을 강요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집 담장 안은 조용했습니다.
어른들은 작은 목소리로만 이야기를 나눴고,
저는 방문을 닫는 손의 속도와
찻잔 내려놓는 잔잔한 소리로
집과 세상의 분위기를 읽는 아이였습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그런 날이었습니다.

“이 집은 참 조용하군요.”

그는 신문 기자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일을 한다고도 했습니다.
몰락한 집안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따라다녔지만,
그의 말투에는 조금의 비굴함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곧았습니다.

“조용한 것이 늘 좋은 것은 아니지요.”

그가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질문은 적게 하고 관찰은 많이 하는 것이
저만의 방식이었으니까요.
그리하여 저는 그의 손등에 남은 작은 상처와,
말끝에서 사라지지 않는 단단함을 기억했습니다.

그는 소리내어 말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침묵이 사람을 살릴 때도 있지만,
죽일 때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기록해야 합니다.”
“이대로 모르는 척하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남겠지요.”

그의 말은 늘 직설적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들이 무례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오래도록 기억했습니다.
남의 말을 잘 기억하는 것이
제 오래된 습관이었으니까요.

저는 이렇게 배웠습니다.
말하지 않아야, 침묵을 지켜야, 살아남는다고.

그는 이렇게 믿었습니다.
소리내어 말해야 비로소 산다고.

우리는 같은 시대를 보면서도,
비슷한 나이대임에도
다른 곳에 서 있었습니다.

해방이 가까워질수록
도시의 공기는 더 거칠어졌습니다.
체포 소식이 들렸고, 누군가는 사라졌습니다.
우리 집 어른들은 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괜히 말을 섞어 엮이지 말거라.”
“우리는 중립을 지키면 된다.”

중립.
그 단어가 얼마나 편안하게 들렸는지 모릅니다.

어느 날 밤, 그가 다급히 찾아왔습니다.
숨이 가빠 보였지만
눈빛은 여전히 또렷했습니다.

“제가 정리한 자료를
잠시 맡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작고 두꺼운 서류철을 내밀었습니다.
독립운동 관련 기록이었습니다.
이름과 날짜, 증언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왜 저에게 이런 걸 맡기시나요.”

“이 집은 안전하니까요.”
그리고 잠시 후, 그는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모르는 척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 말이 제 가슴을 세게 쳤습니다.

그는 저를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단지 아무 걱정 없이
자란 아가씨가 아니라,
시대의 균열을 가장 먼저 눈치채고도
모르는 척해온 사람이라는 것을.

그날 밤, 저는 쿵쾅거리는
심장 탓에 잠들지 못했습니다.

사랑은 사적인 감정이었지만,
그 시대에선 가장 위험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를 걱정하는 마음은 곧
그의 말에 동의하는 일이 되었고,
그의 말에 동의하는 것은
침묵을 배신하는 일이었으니까요.

며칠 뒤,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집 안은 여전히 조용했습니다.
너무도 우아하고, 고요하게.

저는 서류철을 꺼냈습니다.
손이 떨렸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맑았습니다.
모두가 소리를 지를 때,
저는 끝까지 품위를
버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품위가 침묵을
의미하지는 않기를 바랐습니다.

저는 그가 일하던 신문사로 갔습니다.
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습니다.
부잣집 딸이라는 이름은
늘 안전한 울타리였으니까요.
그 울타리를 벗어나는 순간,
저는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말했습니다.

“이 기록을 기사로 남겨주세요.”
“사라지지 않게.”

목소리는 고요했지만,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전처럼 모르는 척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예의를 지켰고,
여전히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침묵을 선택하지는 않았습니다.

폭력적인 시대 속에서
거친 언어와 명령이 오가던 그 시절에
저는 끝까지 말을 잃지 않았습니다.

우아함은 제 마지막 방패였고,
동시에 저항이었습니다.

해방은 결국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늘 거리에서만 쓰이지 않는다는 것을.
담장 안의 침묵과,
단 한 사람의 결심으로도 시작된다는 것을.

그가 남긴 마지막 문장 중
하나를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던 것이 된다.”

이제 저는 압니다.
세상의 일은 남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침묵은, 때로 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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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리 활동도 같이 하는 백도설 인사드립니다!
https://curious.quizby.me/Fond…

작년 겨울에 어떤 익명 분께서 근현대 소설을
써달라고 부탁하셔서, 부족한 필력으로
끄적끄적 써 본 단편 소설입니다:)

분명 2월 초에 가져오겠다고 했는데
늦어서 너무너무 죄송할 따름이네요..
이걸 보시는 익명샘 진짜 죄송하고 감사해요ㅜ

여기까지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감상평이 살짝 궁금하기에 한 마디 적어주시면
제 무한한 감사와 애정과 사랑을!!! 드려요 ㅎㅎ

그럼 다들 남은 하루도 즐겁게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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