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의 뒷면은 창백했다 ]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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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05 14:51조회 40댓글 0하루
열두 살은 참 이상한 나이다.
무언가를 이해하려 하면 너무 어리고, 모르는 척하기엔 너무 많이 알아버린 나이.
나는 요즘, 내 안에서 무언가가 자라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그것은 키도 아니고, 머리카락도 아니고, 단지 말해지지 않은 말들. 언어가 되지 못한 기억들이 내 뼈 사이를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자라나는 감촉.

나는 이 집에서 열두 해를 버텼다.
어떻게 버텼는지는 나도 모른다. 기억은 마치 벽지처럼 덧칠되어 있어서, 어디가 처음이고 어디가 마지막인지 알 수 없다. 단지, 아빠의 발소리는 지금도 내 심장보다 먼저 알아차릴 수 있다. 그건 훈련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아빠는 나를 때린다. 이유는 다양하지만, 결국 모든 이유는 ‘그의 무력감’으로 귀결된다.
그는 직장에서 화가 나면 나를 때리고, 술에 취해 기분이 좋으면 더 세게 때린다. 기분 나빠도, 좋아도, 나는 그저 표적이다. 활보다 먼저 놓여진 화살 같은 존재.

엄마는 말이 없다. 아니, 말이 없어진 지 오래다.
그녀는 눈으로만 말하고, 때로 그 눈빛조차 나를 지나친다. 사랑은 바라보는 것이라지만, 이 집의 시선은 언제나 나를 꿰뚫고 지나간다. 그래서 나는 자주, 투명 인간이 된 기분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투명함은 무게가 있다. 아주 무거운, 질식할 듯한 무게.

밤이면 나는 천장을 본다.
그건 유일하게 나를 때리지 않는 면이었다.
천장엔 금이 가 있다. 아마도 위층 사람들이 너무 세게 걸었겠지.
나는 그 금을 ‘달의 뒷면’이라고 부른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외롭고, 숨죽인 빛을 흘리는 장소. 어쩌면, 나 자신.

학교에서 선생님은 말했다. “가정은 아이의 뿌리야.”
나는 속으로 웃었다.
그 뿌리는 썩었고, 내 영혼은 그 위에 자란 잡초 같은 것이었다. 누가 나를 보듬어주지 않았기에, 나는 스스로 자라는 법을 배웠다. 다만, 삐뚤고 가시 돋친 채로.

친구가 팔에 난 멍을 보고 물었다.
나는 “괜찮아. 그냥 다쳤어.”라고 말했다.
그때 내가 느낀 건 거짓말의 죄책감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지 못한 내 무력감이었다. 진실은 도와주지 않는다. 진실은 때로 너무 무력해서, 오히려 나를 배신한다.

가끔, 나는 내가 괴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런 집에서 살면서도 아직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어딘가에 좋은 어른이 있을 거라 믿는 스스로가 바보 같아서, 울지도 못한 채 그 믿음을 품고 있다.

그러다 나는 알게 되었다.
희망이라는 건, 아주 작고 차가운 조약돌 같은 거라는 걸.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점점 모서리가 닳고, 둥글게 변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그것이 무언가를 꿰뚫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조약돌을 마음속에 품고 산다. 그것만이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

나는 아직도 이 집에 있다.
하지만 더 이상 완전히 갇혀 있진 않다.
왜냐하면 나는 매일밤, 달의 뒷면으로 마음을 보내기 때문이다.
거기엔 아무도 나를 때리지 않고, 아무도 침묵하지 않는 세계가 있다.

그곳은 아직 현실은 아니지만, 언젠가 내가 만들 세계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아무 욕설도 섞이지 않은, 오직 사람으로서의 이름.

그날이 오면, 나는 말할 것이다.

“열두 살이었어. 하지만 그때 나는 이미 세상을 건너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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