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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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10 21:18조회 28댓글 0바이퍼
서늘한 밤 공기. 바닥에 우수수 떨어진 작은 벛꽃잎 조각들. 그리고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열쇠.

그 열쇠는 내 집의 열쇠가 아니었다. 바로 ' 그 ' 의 열쇠였다. 정확히는, 그의 마음을 열 열쇠.

*

그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인간형 로봇이었다. 결국 몸으로 보이는 형체 안엔 0과 1로만 이루어진 기계 덩어리가 한창일텐데, 나는 그를 사랑했다.

몇 년만에 처음으로 사랑의 내음을 맡아서? 아니면 그가 인공적으로 내게 준 사랑은 너무나 달콤했어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나도 그를 왜 사랑하는지 모르겠으니까.

언젠가부터 그는 내 곁에 항상 있었다. 우울할 때면 내 옆에 다가와 등을 쓸어내려주었고, 행복할 때면 같이 마주보며 웃곤 했다. 나는 그의 웃음이 좋았다. 비록 그가 인간이 아닐지라도.

그런데, 그는 날 배신했다. 어젯밤부터 나는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고 내 손은 점점 떨려오며 불안을 만들어갔다. 하긴, 그는 내게 많은 애정과 관심을 주었지만 내가 그에게 준 것은 고작 입으라고 준 천 쪼가리 몇 개였다. 그러니 내게 실망하고 떠난걸까. 그렇지만 나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는데 • • •

- 열쇠?

그가 입었던 바지를 정리하려 만지작거릴 때 즈음, 나는 그의 바짓주머니에 무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은색과 금색 사이,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한 빛깔의 열쇠. 그것은 무광 같기도 했고, 유광 같기도 했다.

- 소중한 인연에게 사용하세요!

아주 조그마하게 적혀있는 바람에 시력이 안 좋은 내가 읽는데에 애를 먹었다. 소중한 인연, 내게는 ' 그 ' 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하등 필요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럼 이 열쇠를 어디에 꽂아 사용해야 하는가? 소중한 인연을 겨우 찾았는데, 내 안드로이드였는데. 아무도 열쇠의 쓸모를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또 혼자였다.

- 이 열쇠는 자신의 집 현관문에 사용하세요!

열쇠의 앞면을 다시보니 없던 글씨가 생겼다. 자신의 집 현관. 나는 당장 집 밖으로 나가 열쇠 구멍에 그 열쇠를 꽂아넣었다. 열쇠를 꽂아 열어본 적이 없어 무척이나 애를 먹었지만.

- 너야...?

갑자기 들이닥친 자욱한 안개 사이로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아마, 그일 것이다. 그의 육체가 틀림 없었다.

- 너구나! 보고싶었어!

그렇게 달려가 안았던 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거울 너머의 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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