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는 말했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찢어질 것처럼 헤진 고서에 그 문장이 적혀 있었다. 데카르트는 십칠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로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방법적 회의론에 따라…… 아니, 이런 정보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정보를 얻는 즉시 다짜고짜 분석부터 하는 건 인간답지 않았다. 세상에 보편적으로 통하는 상식 말고 네 생각을 찾아. 유빈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에리스에겐 ‘생각’이란 것조차 헷갈리는 개념이었다. 인터넷에서나 찾을 수 있는 개념은 단어를 이해하는 것에는 하등 도움 되지 않는다. 에리스는 생각하는 것보다 계산하는 것에 능숙했다. 숫자를 더하고 빼는 것은 일 초도 안 걸리면서 나비 보고 꽃 떠올리는 건 그 꽃 보고 아름답다 생각하는 건 몇 분이 넘게 걸릴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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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11ㅎ
도서 반납함에 놓인 책들을 들고 하나하나 제자리에 올려놓는 것. 그게 에리스의 유일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도서관을 찾는 사람은 눈에 띌 정도로 적어서 에리스는 일하는 시간 대부분을 동화책이나 읽으면서 보내야 했다. 어쩌면 도서 반납함에 놓인 책보다 제 스스로 읽고 다시 책장에 돌려넣은 책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일한 이래 지금까지 정리한 책은 총 이천삼백…… 아니, 이런 건 하지 말랬지.
지금 에리스가 들고 있는 데카르트의 철학집은 도서 반납함에 놓여있던 것이었다. 하루 온종일 도서관에 들렀던 사람은 고작 두 명이 전부, 그중 한 명이 반절까지만 읽고 간 것이었다. 에리스는 책을 펼치고 훑어봤다. 철학 분야는 에리스가 가장 어려워하는 장르 중 하나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같은 문장도 그랬다. 존재하기 위해선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에리스는 자의로 생각하지 못한다. 모든 것은 입력된 알고리즘일 뿐이었다. 그 알고리즘을 뛰어넘는 감정이나 회로가 언젠가 생겨날 것을 바라기엔 현실성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렇다면 에리스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책을 책장에 끼워넣곤 수많은 청구기호들을 본다. 에리스도 그들 중 하나였다. 이름 대신 일련번호를 가지고 태어나선 양산형 로봇으로 팔리기 직전까지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는 삶을 살아야 했던 에리스는 개발 도중 결함이 발견되어 그대로 폐기 처리됐다. 쓰레기장에 처박힌 에리스는 실수로 버린 책 몇 권 찾으러 쓰레기장을 뒤지던 한유빈 손에 발견됐다. 아마 결함 로봇 폐기 담당자들도 쓰레기장에 갖다 버린 로봇이 다시 살아날줄은 몰랐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에리스 몸에 그 흔한 로봇 3원칙을 넣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제일법칙,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선 안 된다.
에리스는 전원이 켜지자마자 유빈을 공격했다. 유빈은 피 철철 흘리면서도 욕 한 번 하질 않았다. 그 의연한 미소에 전투 로봇의 공격성마저 움츠렀다. 이후로 에리스는 팔자에도 없던 제일법칙을 추가했다. 제일법칙, 에리스는 한유빈에게 해를 입혀선 안 된다.
한유빈은 사십년째 그 도서관을 맡는 중이었다. 도서관에 대한 대대적인 정부의 지원은 삼십년 전 이후로 끊겼고, 대 홀로그램 시대가 도래하며 종이책 찾는 사람마저 현저히 줄어갔지만 한유빈은 죽을 때까지 도서관을 운영하겠다는 그 신념 하나로 문 닫는 날 한 번 없이 책을 정리해왔다. 새 책 하나 없이 전부 낡아 바스라질 것 같은 고서들을 제 자식마냥 대했다. 한유빈은 그 낡은 책 냄새가 그 어떤 향보다 좋다고 했다. 그 이후로 에리스도 종종 책 냄새를 맡았다.
고요한 피아노 소리가 도서관을 가득 채우면 폐관 시간이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보통 이 시간 전에 한유빈이 도서관에 들러 항상 폐관 정리를 도왔는데 오늘은 사람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한유빈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다. 서둘러 정리를 끝내고 문 잠그고 집까지 걸어갔다. 도서관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십오 분이 걸린다. 어느새 해가 진 하늘을 보고 에리스는 언젠가 다시 뜰 햇빛을 상상했다. 해는 뜨겁다. 표면 온도는 육천켈빈에 육박한다.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고작 제게 닿는 햇빛은 피부를 녹이는 것조차 하지 못한다.
집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한유빈은 거실 의자에 앉아 쥐죽은듯 자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제야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유빈은 도통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께가 오르내리지 않는다. 심장 박동이 없다. 상태를 보아하니 급성 뇌출혈 아니면 심정지 같은 질환으로 보인다. 인간은 언젠가 완전히 에너지를 잃는다. 배터리 같은 것으로는 되살아나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가장 불확실한 개념. 죽음은 생물이 생명을 잃는 현상으로 일반적으로는 심장 기능의 완전한 정지 상태를 가리키나…… 아니, 이런 정보는 원하지 않았다. 세상에 보편적으로 통하는 상식 말고 네 생각을 찾아. 유빈이 살아있다면 분명 그렇게 말해줬을 것이다.
에리스가 한유빈의 뺨을 쓰다듬었다. 미동조차 없이 한유빈과 닿는 손끝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프로그램이 불규칙적으로 발작하고 있었다. 제일법칙 위반. 제일법칙 위반. 에리스는 한유빈에게 해를 입혀선 안 된다. 해를 입히진 않았는데, 이미 입은 해를 치료하는 방법은 없는 건지.
긴급번호에 신고라도 할까 싶었지만 이 몸 상태로는 뭘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신고라도 했다가 폐기처리됐던 전투로봇이 변이되어 사회에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거야말로 큰일이었다. 한유빈은 도서관을 제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다. 도서관을 이어받을 유일한 후임자는 에리스 하나였다. 또다시 강제로 폐기된다면 도서관도 그대로 폐문행이었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일상이 바뀌는 것은 없었다. 에리스는 항상 하던 대로 도서관에 출근했다. 하나뿐이었던 제 모든 것을 잃고 혼자 로봇이 되어 과거에만 존재했던, 로봇 에이아이와는 하등 어울리지 않는 종이책 도서관의 사서장이 되어 책이나 정리하고 있다니 전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사람 형상을 한 에리스는 에이아이 로봇들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인지 교정 절차도 거치지 않아 로봇 특유의 움직임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서관 시설 이용자들 중 에리스가 로봇인 걸 아는 사람은 한유빈과 친한 극소수 뿐이었다. 며칠이 지나고 그들 중 몇 명이 한유빈이 요즘 보이지 않는다며 바쁜 일이 있냐 물었을 때 대답을 머뭇거렸던 건 아마 죽음과 긴밀하기로 익히 알려진 슬픔 같은 감정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세상이 떠나갈 것처럼 울었다. 에리스는 그녀와 가장 가까웠던 사이었음에도 자기 혼자 울지 않았다는 사실에 깊은 모순을 느꼈다. 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당신이 그렇게나 강조하던 ‘생각’이란 것에 감정의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또 며칠이 지났다. 집에서 썩은내가 나기 시작해서 한유빈을 토막내 냉장고에 옮겼다. 하루종일 제일법칙 위반 주의 하는 소리가 온몸에서 울리길래 그냥 일부 프로그램 전원을 완전히 꺼 버렸다. 세상의 삼분의 일 정도가 그때 무너졌다. 이상하게도 이후로 생각이란 것을 더 깊게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데카르트의 철학 책을 읽던 사람이 도서관에 다시 찾아와 그 책을 완독하고 떠났다. 철학 책을 전부 읽은 그 사람은 회의론에 대해 무언가 깨달은 것이 있었을까. 생각하고 존재하는 것에 대한 법칙 같은 것을, 생각하는 법을, 존재라는 것을 어느정도 깨닫고 그렇게 돌아갔던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다시 이 책을 읽기 위해 도서관에 돌아올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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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기호를 보고 책장에 책을 끼워넣는다. 이 책이 원래 이렇게 높은 곳에 꽃혀 있었나. 에리스는 까치발까지 들곤 높은 곳에 낑낑대며 책을 끼워 넣다 그만 높은 칸에 아슬아슬 꽃혀 있던 책 전부를 쏟고 말았다. 머리 위로 바닥으로 책들이 우수수 쏟아지는 동시에 손에 들려 있던 데카르트 철학책이 바닥에 떨어졌다. 우연처럼 익숙한 페이지가 보인다.
데카르트는 말했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리고 에리스는 생각했다. 나는 존재하는 걸까?
양자역학적 관점에서 입자는 관찰되기 전까지 여러 상태가 중첩된 파동의 형태로 존재한다. 에리스는 한유빈에 의해 전원 버튼이 켜진 순간부터 세상을 인지했고 이진법처럼 일과 영으로 점칠된 세계에서 중첩된 영과 일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든 건 한유빈이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느낀 세계는 숫자 영과 일만큼 간단하고 명료하지 않았다. 세상을 바라보면 그제야 세상이 발생했고 대화하는 순간 상대방의 개념이 탄생했다. 인터넷과 단절되었던 세계는 그토록이나 아름다웠다. 동화책을 읽는 것만큼 믿을 수 없는 환상이었다.
‘나’는 거기서 태어났다. 눈을 뜨고 어느덧 생각이란 것을 배워나가며 깨달은 건 서로간의 존재였다.
처음 전원 버튼을 키고 한유빈을 만났을 적이 떠오른다. 모든 것이 눈부시게 빛나고 에리스는 한때 세상이었던 것을 본다. 세상은 웃고 있다.
당신에 의해 태어났으므로
그날, 우리의 세계는 시작되었다.
철학책의 첫 페이지를 펼친다. 몇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이해 가지 않는 구절들은 많았다. 철학책 같은 건 로봇에겐 정말 어려운 분야여서 수없이 노력해도 평생 깨달을 수 없는 것들도 많았다. 생각과 감정은 일반적인 로봇에겐 입력되지 않은 것이었고 일반적인 로봇이 아닌 에리스에게도 마냥 쉬운 것들은 아니었다. 행복 슬픔 분노 같은 것들이 섞여서 프로그램이 꼬였다. 생각은 어려워서 하고 싶지 않아.
그런데 왠지 에리스는 한유빈의 부고에 왜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는지 알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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