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보이지 않는 여름
||| 손끝에 남은 열기
오늘도 역시 영어 독해 지문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온통 단어 대신 붉은 벽돌과, 그 너머에서 들려오던 키득거림 같은 것만 맴돌았다. 시계를 보니 밤 10시 반. 가방을 대충 챙겨 들고 독서실을 나섰다.
밤공기가 며칠 전보다 조금 더 선선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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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골목길로 접어들어 걸음을 옮기는데, 저 멀리 가로등 불빛 아래 붉은 담벼락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앉으며 숨을 고르기도 전에, 벽 너머 마당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오늘 좀 빨리 왔네?"
여름이의 목소리였다.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낮게 깔린 목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조용히 건너왔다.
"어. 오늘따라 공부가 잘 안 돼서 그냥 일찍 나왔어. 너는 안 자고 뭐 해?"
"나야 뭐 너 기다리면서 쉬고 있었지. 며칠 전에 내가 너한테 아껴둔 거 있다고 한 거 기억나?"
"책갈피 말고 또 있어?"
"응. 잠깐만, 벽에 붙어봐."
여름이의 말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담벼락에 몸을 바짝 밀착했다. 거친 벽돌의 감촉이 교복 셔츠를 타고 전해졌다. 담장 위쪽, 벽돌이 하나 빠져서 생긴 작은 틈새로 부스럭거리는 비닐 소리가 가까워졌다.
"이거 가져가."
틈새를 들여다보니 투명한 비닐에 포장된 무언가가 밀려 나오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들었다. 묵직하고 약간 울퉁불퉁한 촉감이 손바닥에 얹혔다.
가로등 불빛에 비춰보니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쿠키였다. 초코칩이 콕콕 박힌 둥근 모양새가 제법 그럴듯했다.
"와... 이거 네가 만든 거야?"
"어. 낮에 집에서 구웠어. 너 맨날 밤늦게까지 공부하느라 기운도 없을 것 같아서."
"대박. 너 요리도 할 줄 알아?"
"요리까지는 아니고, 그냥 굽는 건 좀 해. 얼른 먹어봐. 맛없어도 맛없다고 하기 없기야?"
비닐을 뜯었다.
훅 끼쳐오는 고소하고 달콤한 버터 향. 매일 눅눅한 흙 냄새만 가득하던 골목길이 순식간에 작은 빵집 앞처럼 변한 것 같았다. 쿠키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바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입안 가득 단맛이 고였다. 종일 영어 지문과 씨름하느라 뻑뻑했던 뇌가 번쩍 깨는 기분이었다.
"어때? 먹을 만해?"
벽 너머에서 여름이가 숨을 죽이고 내 대답을 기다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괜히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음... 좀 이가 아픈데. 이거 돌멩이 아니지?"
"아, 뭐래! 초코칩 엄청 많이 넣었단 말이야. 먹기 싫으면, 다시 줘!"
여름이가 진짜로 속상했는지 담벼락 틈새로 손을 불쑥 밀어 넣었다.
다시 낚아채려는 듯 손가락이 좁은 틈새에서 허공을 조급하게 헤집었다.
찰나였다.
내 손가락과 여름이의 손가락 끝이 아주 잠깐, 스치듯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서늘했던 밤공기가 무색하게, 스친 피부 위로 뜨거운 열기가 훅 끼쳤다.
담장 너머에서 크게 나던 부스럭거림이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골목길에는 오직 낮게 웅웅거리는 가로등 소리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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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이야. 진짜 맛있어."
내가 먼저 어색해진 공기를 깨며 낮게 중얼거렸다. 손을 거두어 주머니에 찔러 넣었지만, 닿았던 검지 끝이 여전히 찌릿하게 얼얼했다.
"....정말이지? 맛있다니 다행이네."
여름이는 얼른 손을 빼내고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담벼락 너머 마당에서 여름이가 발걸음을 뒤로 물리는 소리가 짤막하게 들렸다.
나는 남은 쿠키를 아껴가며 천천히 씹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여자애가 구워준 쿠키를 먹으며, 보이지 않는 벽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 이 상황이 새삼스레 낯설고도 수줍었다.
주머니 속에서 아까 스쳤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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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아. 고마워. 잘 먹을게."
"....어, 다음엔 다른 거 또 구워줄게."
나는 다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매일 똑같고 지루하던 나의 밤이 조금씩 더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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