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야 한다는 불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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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01 21:42조회 46댓글 0Chaei
언젠가 내 몸에 망념이 개화했다. 쇄도하는 낙심, 증식되는 부조리와 수선의 난사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심연 속에서 보는 빛의 잔열은 허무하기 그지없었고, 대신 엉뚱한 의문이 자리 잡았다. 삶이란 무엇인가?

이서(怡瑞)는 낡은 가죽 소파에 기대앉아 손에 든 연분홍색 표지의 책을 내려다보았다. 색깔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색채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그녀의 시야는 채도 10%의 희미한 잿빛으로 덮여 있었다.

이곳은 연인 현(賢)이 운영하는 작은 북카페, ‘페이지의 그림자’였다. 그녀가 이 카페에서 일한 지 3년, 현과 결혼을 약속한 지 1년. 그리고 그녀의 눈에서 색이 사라진 지 꼬박 석 달째다.

현은 빛이었다. 너무나 정직하고, 헌신적이며, 모든 것을 사랑할 줄 아는 빛. 세상은 '현 같은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 여자는 죄인이라고 속삭일만큼. 모든
과거와 외로움은 현의 따뜻함 속에서 구원받아야 마땅했다.

정답은 너이다. 삶의 의미는 너여야 했다. 하지만 연은 이미 꼬일 대로 꼬여버렸고 내 삶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몸이 현을 거부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무릎을 꿇고 반지를 건네던 순간부터였다. 맹세와 약속의 무게가 척추를 짓눌렀고, 그때부터 눈은 사랑과 행복의 색깔을 보지 못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현이 커피 두 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 윤곽은 분명했지만, 언제나처럼 희미한 회색의 잔상일 뿐이였다.

"오늘 오후에 결혼식 리허설 스케줄 확인했지? 이제 정말 코앞이야."

현은 해맑게 웃었지만, 그 웃음은 그녀의 뇌리에서 상한 우유보다도 못한 찌꺼기가 되어 헤매고 있었다. 널 만난 건 기적이라고, 그렇게 해맑게 웃던 시절은 이제 그녀에게 저주였다. 그를 사랑해야 한다는 강박.

"응, 봤어." 목소리도 색을 잃은 듯 건조했다.

누군가 나에게 병에 걸렸다고 한다면, 그것 또한 결코 부정하지 못할 현실이다.

나는 병에 걸렸다. 너를 사랑해야 하는 세상이 미운 여린 소녀의 반항심은 애정결핍의 희화화일 뿐이며, 책임져야 할 불치병이다.

그날 오후, 이서는 리허설 장소에 가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현이 아끼는 분홍색 펜을 찾아, 카페 가장 구석진 벽에 작은 글을 적었다. 희미하게 잿빛으로 보이는 펜의 색이,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마음속 아픔들이 가장 선명했다.

"내가 누구인지. 누구여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고,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아무런 미련도, 설명도 남기지 않았다. 다만 문장 아래, 마치 병의 진단서처럼, 단 두 단어만을 덧붙였다.

'색채결핍증(色彩缺乏症)'

그것은 자신에게 내린 병명이었고, 현을 향한 마지막이자 영원한 거부였다. 빛은 그림자조차 붙잡을 수 없었다.

이제 빛도 사라져만 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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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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