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27 17:09•조회 11•댓글 0•쩰리
드디어. 내일은 결과가 나오는 날.
딱히 기대는 안 하지만 내가 맡으려고 하는 연출 쪽은 지원자가 거의 없어서
뽑힐 가능성은 꽤 높다.
율이는 통과했겠지? 나는? 빨리 학교에 가고 싶어졌다.
왠지 부끄러웠다. 기대는 '안' 된다고 하면서 이렇게 긴장하는 나를 보니.
***
다음 날 아침. 엄마가 설정해놓은 알림 때문에 평소보다 30분은 일찍 깼다.
눈을 비비며 엄마를 부르자 엄마가 한달음에 뛰어 왔다.
"엄마 이거 알람 뭐야? 엄마 때문에 잠 잘 시간 놓쳤잖아...!"
엄마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네 친구들은 그것보다 1시간은 일찍 일어나서 공부한다는데, 너
의대 가려면 당연한 거..."
"엄마. 나 의대 안 간다고 몇 번이나 말해. 그거 내년에 고등학교 가면
다른 지방고에서도 전교 1등은 필수 조건인데 지금 나 전교 50등 안에도 못 들거든?"
"됐어. 넌 의대 갈 거야. 괜히 어려운 일 하지 말고. 그리고...너 이거 뭐야?"
엄마가 내 가방에서 연극 동아리 신청서 복사본을 빼들었다.
"딱 보면 몰라? <연극 동아리 신청서>잖아."
"그러니까, 그게 문제지! 엄마가 분명히 수학, 과학이나 의대 지망생들 많은 화학·생명과학
관련 실험 동아리로 신청하라고 했잖아."
"몰라, 우리 고등학교는 후져서 그런 간지나는 멋진 애들이나 동아리도 없고, 내 절친도
연극 동아리 들어간대서 같이 신청한거야. 의대 재미없어서 뭐해."
"어우, 답답해...! 너 이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그리고 동아리장한테 신청 취소한다고 말해."
"그건 안돼. 오늘이 결발이거든. 그럼 엄만 이제 회사 가!!"
엄마 등을 떠밀고 문을 쾅 닫았다.
아침부터 엄마랑 말싸움을 한 탓에 기운을 다 썼다...
***
오늘도 율이를 만나 연극 동아리 이야기를 했다.
"뽑힐 수 있을까? 나 어제 한숨도 못 잔듯."
율이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래? 나도 어제 좀 긴장했어."
학교 도착 후 둘이 곧바로 학교 공동 동아리 게시판에 가봤다.
'연극 동아리 신청자 결과 발표'
여주인공 역: 정윤하
남주인공 역: 박준성
.
.
.
어딨지? 아, 드디어 찾았다. 맨 밑에.
의상/음향 연출: 김율
조명/배경 연출: 신혜린
연출 역은 진짜 인기가 없었나 보다. 내가 대충 써서 낸 신청서로도 통과하다니.
율이는 내 손을 잡고 엄청 뛰었다.
그렇게 좋은가.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나란히 연출이 된 우리 둘.
연출 역에 비해 주인공 역은 진~짜 치열했다. 그때 면접 줄을 보니 남주만 해도 서른 명 넘게
줄을 서 있었다. 여주는...말할 것도 없고. 오십 명은 될까?
우리 학교는 졸업식 쯤에 하는 연극제가 엄청 유명한데, 거의 지역 명물 수준이다.
그래서 우리 학교 인근 주민들이 모두 구경하러 온다.
그리고...역시 여주, 남주는 인싸가 맡은 것 같다.
둘다 3학년에서 제일 유명한 애들.
아...내 짝. 오늘은 특히 더 시끄러울 것 같다.
***
반에 들어가고, 지루한 수업 후에 드디어 7교시.
이번에는 그나마 나은 음악 '역사' 시간이었다. 수업 후에 우리 음악 쌤이 갑자기
수행평가로 발표를 할 것이라고 말하셨다.
2명씩 한 조로...음악의 역사와 거장들, 그리고 그들의 음악적 특징 등을 조사해오기.
클래식 노래를 좋아하긴 하는데, 발표는 진짜 못해서 기분이 안 좋아졌다.
선생님이 제비뽑기로 짝을 뽑아주셨다.
'김서연, 이준호'
'강미연, 허지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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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혜린, 박준성'
여자 아이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부러운 눈으로.
나는 지금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발표는 3주 뒤다~ 잘 준비해와! 화이팅, 화이팅, 화이팅!"
선생님께서는 이 말만 남기시고 쏙 빠져나가셨다.
***
종례 이후에 연극 동아리 모임이 있었다.
율이와 연극 동아리 본부(?)라고 해야하나?
어쨋든 가보니 동아리장과 지도 선생님 두 명이 계셨다.
"얘들아 안녕? 이번에 뽑힌 친구들 다 모인 거 맞지? 올해 할 연극 알려주려고 왔어."
옆에 계신 선생님이 서류를 넘기더니 계속하셨다.
"바로...베니스의 상인! 워낙에 셰익스피어가 유명하잖니. 그래서
희곡 대표작인 <베니스의 상인>으로 뽑았어."
*아이들 환호*
"다들 좋아해줘서 고맙다. 내가 각본가고, 옆에 계신 선생님께서는 연기 지도 선생님이셔."
"여주랑 남주는 남고, 나머지는 가도 돼!"
동아리장이 말하자 박준성과 정윤하만 남기고 아이들이 빠져나갔다.
어떤 애들은 곁눈질로 웃으면서 둘이 사귄다고 말하며 떠났다.
"둘이 진짜 백퍼 뭐 있음." 율이도 돌아보며 말했다.
이렇게 보니 정말 잘 어울린다. 이면 연극제는 정말...얼굴빨로 성공할 듯 하다.
[3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