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上殘光(해상잔광) 𝐏rologue : 노을의 약속


*아래 큐리어스 방문 후 본문 정독을 추천 드립니다.
https://curious.quizby.me/hais…
*꽤나 호흡이 긴 글이지만, 예쁘게 읽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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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틈으로 스며든 바람에서 초가을의 향이 옅게 묻어난다. 해가 기울며 번지는 붉은 빛에 먼지와 햇살이 얽혀 천천히 떠다닌다.

탁자 위에는 제 도려가 마시다 급히 두고 간 찻잔이 식어 있다.
언제나 그렇듯 정갈히 놓아둔 자리.

손끝에 닿은 온기는 이미 사라졌지만 잔잔히 남은 찻향이 그를 대신해 제 곁에 앉아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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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대뜸 바다를 보고 싶다며 투정을 부렸었다.

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어든지 들어줄 이라는 걸 알았음에도 오늘따라 그를 재촉하고 싶어 그랬더란다.

반 시진 전, 객잔에 들어와 짐을 풀고서는 묵묵히 두 잔의 차를 따르는 남망기의 곁에 앉아 나지막이 이곳의 빙당호로가 참 달았었거니, 하고 중얼거렸다만..

오랜 시간 저를 안은 채로 검을 타고 날아와 지친 기색이 역력함에도 제 목소리를 듣자마자 전낭을 집어들었다.

일어나 “위영, 다녀올게.” 한 마디 하더니만 “...남잠?”
그 이름을 부를 새도 없이 시장으로 간 제 도려.

그 사랑스러운 뒷모습을 상기하며 또 상념에 젖어든다.

남망기, 남잠. 저의 도려, 연인.

세상 어떤 난잡한 것이든지 푸른 기운으로 정화시킨다는 아정(雅正)함의 소유자이자, 고소 남씨의 전도유망한 수사.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의복을 갖추고 다니는 남망기의 곁에는 늘 그림자차럼 새까만 의복에 새빨간 머리끈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맨 사내, 저가 있었다.

남망기의 넓고 단단한 품과 그 마음의 주인인 저는 무지한 세간 사람들 눈에는 사악하기 그지없는 이였다.

‘겉도 속도 시커먼 이릉노조 위무선’ 이라 불리며 무지한 세간 사람들의 손가락질조차 기꺼이 응수하며 지금껏 살아 가고 있는 이유는 제 도려 남망기, 그 하나뿐이렸다.

사랑스러운 연인이 그 아정한 입술로 제 이름을, “위영.” 하고 부르면 “남잠!” 하며 해맑은 미소로 화답하는 것.

오직 그 평범하고도 지극히 소중한 순간이 심장이 뛰는 이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잔잔하고도 깊은 상념에 빠진 틈에.

- “쿨럭..”
작은 핏방울들이 손등에 살포시 흐트려졌다.

마치 저들의 존재감을 잊지 말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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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혼이 이 몸과 어긋나며 생긴 틈이 조용히 나를 삼키고 있었다.

늘 지니고 다니던 새까만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내자 새빨간 선혈은 진한 검은색에 묻혀 더 이상 눈에 띄지 않는다.

- “으음.. 오늘인가.”

기괴했다. 이토록 덤덤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자신이.

창백하기 그지없던 얼굴빛이 때마침 제 연인의 발소리를 듣고는 조금 화사해진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오는 언제나 올곧고 아정한 걸음.
듣기만 해도 마음이 고요해지는 소리.

한없이 다정한 사랑을 제게 주는 그에게 두 번,
아니,
벌써 세 번 다시 이별의 아픔을 주어야 한다니.

...이것이 나의 벌일까.

한 생을 그토록 떠돌며 어지럽히던 내가,
결국 가장 사랑하는 이를 울게 만들 운명을 타고난 걸까.

진즉 알았다면 남잠, 난 너를 사랑했을까?

저 방문을 열고 그가 들어오면,
그 잔잔하고 다정한 눈동자에 제 얼굴을 담으면,
세상에서 가장 화사한 웃음을 그려야지.

오늘만은.
오늘만큼은.

찻잔 속 물빛이 흔들리고, 그 안에서 노을빛이 부서진다.

그 빛이 긴 세월을 떠돌아 성한 곳 하나 없는 흉터 투성이 영혼의 마지막 하루를 물끄러미 비추고 있었다.


—

주홍빛이 하늘을 물들일 때에 맞춰 바다로 향했다.
풀내음에 서서히 바닷내음이 스며들어 상쾌하기 그지없다.

... 위무선이 조용하다.

가장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결합한 문장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남망기의 머리에서 메아리친다.

본래 먼저 입을 여는 법이 없는 남망기는 도무지 알 틈이 없는 위무선의 속을 들여다보려는 듯 지그시 제 도려를 응시한다.

- “..아.”

이윽고 남망기가 나지막이 탄성을 내뱉는다.
제 도려는, 저에게, 미안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누구보다 상처가 많은 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것을 염려하고 있다.

그리하여 끝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두려워할 새도 없이, 그 깊이를 헤아릴 수도 없는 속을 조용히 난도질하고 있었다.

남망기는 제 도려와 맞춰 걷던 발걸음을 거뒀다.

그제야 위무선이 남망기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 “위영.”

남망기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진다.
그 짧은 두 글자에, 그 찰나의 숨결에, 감추지 못한 두려움.

그 두려움의 떨림을 위무선은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어찌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하랴.
그러나, 위무선은 웃었다.

순진무구한 아이처럼 웃으며 남망기의 팔에 제 팔을 걸고 당연하다는 듯 남망기의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대더니만 길을 재촉했다.

- “노을은 금방 숨어버리고 말잖아!”


위무선의 한 마디가 남망기를 이끌었다.


—

... 살고 싶다.
본래 삶도 죽음도, 인간의 가치 없는 산물이라 여기었다.

그랬던 제 생각이 완전히 바뀐 이유는 다름 아닌 제 도려, 남망기의 존재와 무구하고 무한한 사랑이었겠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이어졌다.

나는 어떤 삶을 택했지? 그저 무모한 정의 뿐이었나?
어쩌면 제 치기 어린 행동이 제 도려에게 상처만 주었나?

위무선은 그 어떠한 답도 찾아내지 못했다.

오직 진실된 명제로 남아있던 건 ‘마지막‘ 뿐이었으니.


—

해가 바다 끝으로 떨어지자 붉은빛이 수면을 스쳤고,
파도는 잔잔히 부서지며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흐려졌다.

- “남잠, 정말 예쁘다.”

남망기의 품에 안겨 앉아 있는 위무선이 화사하게 웃으며 제 허리에 올려진 남망기의 손을 잡았다.

바람에 새빨간 머리끈과 머리카락이 사정없이 흩날렸고, 눈가에는 희미한 열기가 돌았다.

- “있잖아, 남잠.”

위무선이 노을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남망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제 도려의 손을 꽉 쥐었다.
거세지는 바닷바람이 앗아가기라도 할까 두려운 듯이.

- “... 또 혼자 남겨두고 싶지 않았어.”
그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 “그래서, 그래서 숨겼어. 미안해, 남잠.”

순간, 위무선은 몸을 조금 앞으로 숙였다.
심장이 내려앉는 듯 하더니, 기어코 입가에서 붉은 선혈이 터져 나왔다.

남망기는 제 하얀 소매가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드는 것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서둘러 위무선을 자신의 품에 단단히 가두었다.

- “알아.”

남망기가 초조한 듯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 “다 알고 있어, 위영.”


—

위무선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 도려를 바라봤다.

노을빛이 그의 눈동자에 스며 있었다.

그 안에는 자신이 있었다.
또 사랑이 있었다.

언제나 말없이 나를 품어준 사랑,
너무 따뜻해서 아픈 사랑.

남망기는 평생토록 말보다 눈으로 살아왔던지라
이 순간조차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를 잃는 순간까지도 침묵할 수는 없었다.

- “위영, 네가 다시 내 곁에 돌아온 날, 나는 다시는 하늘에 기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어. 이미 신은 내 소원을 한 번 들어주었으니, 그 이상은 바라면 안 된다고... 그런데 왜...“

또 나를 뒤로 하고 어디로 향하는 거야.

남망기는 뒷말을 끝내 삼키었다.

가지 말라고, 한 숨만이라도 곁에 머물러 달라고.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애절하게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 “이번에는… 이번에는 내가 너를 보내야 해. 그리 해야만 해. 나에게는 자격이 없어. 세상은 너에게 자비롭지 않았고, 나는 곁에 있으면서도 그 고통의 절반조차 덜어주지 못했어..“

잔뜩 붉어진 남망기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매끈한 달빛을 닮은 뺨에서 흘러내린다.

- “...위영, 너는.. 충분히 버텼어. 지금껏...”

차마, 지금 이 순간 하늘이 허락하지 않더라도 그대를 품에 묶어두고 싶노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 “은애해. 사랑해, 위영. 세상이 잊는다 해도, 내 혼은 너를 향해 서 있을 거야.”


—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끝에서, 붉은 빛이 서서히 검게 식어갔다. 노을이 바다에 스며들고, 그 빛이 위영의 눈동자에 마지막으로 닿았다.

시야가 흔들렸다.

“……남잠.”

바위에 부서져 끝내 사라지고야 마는 파도처럼 갈라져나오는 희미한 목소리.

남망기는 고개를 숙였다.
제 도려의 마지막 한 숨결도 모두 담아가겠다는 듯이.

- “응, 위영. 나.. 나 여기있어.”

붉은 하늘이 완전히 식어가고, 바다의 끝이 어둠에 잠기려는 그 찰나, 위무선은 남망기의 귀에 숨처럼 속삭였다.

- “다시.. 돌아올게. 돌아와서...”

숨이 짧게 끊어지고, 피 대신 한숨이 새어나왔다.

- “돌아와서, 네 곁에.. 남을게. 울지 말고.. 다음에..
내가.. 널 찾아갈게. 나중에, 나중에 또 보자, 남잠...”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으려 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쓰디쓴 독배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분명 다음 생에서도 서로일 거라는 막연하고도 단단한 믿음이 있었다.

남잠, 남망기, 저의 도려.
저가 건넨 독배에 잠시만 취해 있어줄래?
비록 제가 없더라도, 그저 한바탕 꿈을 꾸며 살아있어줘.
저승의 모든 문을 열어서라도, 그대가 있는 곳으로 향하겠으니.

...
위무선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

붉던 하늘이 서서히 식어갔다.

부서졌던 파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나가 되어 모래를 적시며, 그들의 마지막 숨결을 삼켰다.

남망기는 품 안의 온기가 식어가는 걸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눈물 한 방울이 위무선의 뺨을 타고 떨어졌다.

이상하게도 저녁빛은 바다 위에서 오래 머물렀다.

마치 아직 떠나지 못한 영혼이, 하늘과 물 사이를 헤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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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나 바다에는 아직, 지지 않은 빛 하나가 남아 있었다.

미련하고도 안타까운 약속 하나만을 담은 빛이,
세 번째 이별을 맞이한 두 혼을 비추었다.

그들의 마지막 시간은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조용하고 아름다운 저녁으로 끝났다...


- “라던데? ...남잠, 그렇게 낭만적이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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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𝐏rologue 𝐄nded.
> 모르시는 단어가 있으실 경우 댓글에 질문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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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으음 소설은 3년만이라 너무 어색하네요
더 자주 써서 필력 늘려볼게요, 죄송합니다..

이 편은 그저 맛보기,
본편은 마도조사를 모르시는 분들도 즐기실 수 있어요
(반응이 별로면 포타에만 올리겠지만요..)

마도조사를 아는 분들이 이 글을 보신다면 아마...
마음이 너무 아파서 눈물 흘리실 수도요 ㅎㅎ

마도조사 소설(개정판)은 카페에서 보실 수 있으니,
여유 되시면 한 번 봐보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