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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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21 21:42조회 26댓글 0파락
나의 몸에서부터 차가운 바닥으로 이어지는 혈류는 그 누구도 읽을 수 없는 글을 제멋대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아, 그토록 두려워했던 격랑에 맨몸으로 마주치는 순간이구나, 드디어. 아팠다.

피와 눈물이 빠져나가 텅 빈 나의 몸 그 틈새로 점차 거세지고도 흐려져 가는 심장박동이 어지럽게 울렸다. 눈앞의 너는 일렁이는 촛불처럼 보였다. 이대로 팔랑팔랑 휘날리다가 공기 중에 섞여 사라져 버려라, 그런 저주를 고통과 함께 삼켰다.

하나가 되자. 오래전부터 버릇처럼 내게 말하던 그것은 매 순간 나의 기억이 닿지 않는 아주 멀고도 아득한 어딘가를 툭 건드렸다. 내가 죽어가는 와중인데도 예외 없이 네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 멍청한 소리. 차마 나는 욕을 할 힘도 없었기에 가라앉는 듯한 몸을 순순히 늘어뜨리고는 애처롭게 시선만을 굴렸다. 답변으로 돌아온 미소는 날카롭게 눈알을 후벼팠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한다니까. 사랑해. 사랑한다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건넨 고백은 악취를 풍기며 나의 목을 강하게 졸랐다. 참을 수 없는 역겨움에 내 평생의 색바랜 감정들이 꾹꾹 눌러 담긴 덩어리를 토해냈다. 마지막의 숨은 무척이나 상쾌했다. 나는 죽었다. 암흑은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아서 무수한 시간을 보내기에 딱이었다. 시린 공기와 모래알처럼 작디작은 생명이 잠든 심장을 파먹었다.

쩌억. 쩍. 나의 허물이 갈라지며 사이로 거대한 꽃이 자라나 너를 삼켰다. 라플레시아. 시체 썩는 냄새에도 너는 구역질 한번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스럽다는 듯 양손에 가득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꽃은 그 거대한 몸집으로 널 집어삼켰다. 붉은 꽃잎의 사이로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 나왔다.

꽃과 함께 뻗어 나온 붉은 실처럼 보이는 것들을 넌 힘겹게 손을 내밀어 낚아챘다. 그것을 자신의 몸 곳곳에 꽂아 넣기 시작했으며, 이내 분노한 듯한 붉은 것들은 강하게 사지를 꿰뚫었다. 네 대부분이 꽃에 먹혔기에 그 자태는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완벽한 양분이 되었다.
누구나 알고 있었을 것이며, 우리들도 그에 포함되어 있었다. 운명을 거스른다는 것은 전쟁의 승리와 혁명의 빛처럼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너는 무슨 짓을 하였지? 바보야.

네가 평생을 바라던 것은 고작 이런 포환이었던 걸까. 아니, 어리석게도 춘몽을 바랐구나. 어린아이의 마음에도 자비란 없어, 그렇게 깨달은 사소함에 일말의 동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더럽게 낭비 되어버린 나의 번데기에게 흙으로 살아갈 앞으로를 축복하며 네 죽음에 난 더는 없는 입으로 크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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