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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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14:05조회 84댓글 6익애
나는 이제 세상이 말하는 정점에 서 있었다. 내 이름 앞에는 수많은 수식어가 붙었고 내 손에는 수많은 트로피가 들려 있었다. 모두가 나를 최고라 불렀다. 가장 빛나는 순간을 나는 홀로 견뎌야 했다. 때로는 공허했고 때로는 압도당했다. 정상의 바람은 차가웠다.

그때마다 불현듯 떠오르는 오래된 질문.

『 2등을 누가 기억해주나요? 』

그러면 나는 조용히 읊조렸다.
이 자리에 서있는 내가 기억한다고.

가장 치열하게 싸운 내가.

그는 나의 그림자였다. 늘 한 발짝 뒤에서 나를 쫓았다. 나의 모든 훈련은 그를 의식하며 시작되었고 나의 모든 질주는 그와의 싸움이었다. 트랙 위에서 발소리가 겹칠 때마다 등골을 타고 흐르던 아찔한 전율. 내가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듯한 불안감.

그는 나를 늘 가장자리로 몰아붙였고 나는 그 압력 속에서 나 스스로의 한계를 깨뜨렸다. 나의 속도를 정의하고 나의 한계를 확장시킨 것은 바로 그의 끈질긴 추격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빛을 향해 달리는 동안 그는 나의 그림자가 되어 내 모든 굴곡을 정확히 담아냈다는 것을. 나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늘 그의 그림자가 가장 길게 드리워졌을 때였다. 승리는 짜릿했지만 곧 허무해졌다. 그 공허를 채울 수 있었던 것은 다음 승부에 대한 기대.

그 기대의 끝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결승선을 통과한 후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나를 향한 환호가 아니라 힘겹게 주저앉은 그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고통을 가장 잘 아는 유일한 존재였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나는 더 이상 트랙을 달리지 않았다.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 인생은 성공으로 가득 찼지만 어떤 순간들은 늘 설명할 수 없는 허전함을 남겼다.

문득 고독한 순간 나는 생각했다. 나의 모든 영광은 온전히 나의 것이었을까. 나의 승리는 온전히 나 혼자 이룬 것이었을까.

그때 깨달았다.

아니다. 결코 아니다.

가장 위대한 승리는 내가 이긴 경기가 아니었다. 그가 나를 이기고 싶어 발버둥 쳤던 그 절박한 순간들이었다. 나의 존재가 그의 열정을 자극했고 그의 간절함이 나를 완성시켰다.

그는 단순한 2등이 아니었다. 나의 모든 빛을 선명하게 비춰준 가장 길고 진실된 그림자였다. 나의 기록되지 않은 트랙 위에서 나의 모든 노력과 고통과 환희를 함께 했던 유일한 동반자.

이제 나는 안다.

세상이 기억하지 못해도 나는 기억한다. 그의 이름은 트로피에 새겨지지 않았지만 나의 모든 성과 나의 모든 영광 나의 모든 존재 그 자체에 그의 이름이 아로새겨져 있음을.

그는 나의 가장 위대한 승리를 만들어준 자였다.

가장 치열하게 싸워준 유일한 경쟁자.

나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그가 만들어낸 완성의 그림자였다.




✒ || 익애 || 가장 치열하게 싸운 그 날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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