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curious.quizby.me/zeoz…봄비가 부슬거리며 내리는 밤, 어두운 방을 촛불이 은은하게 밝히고 있다. 바닥엔 화병 도구가 널려 있고 술병들은 하나같이 제자리를 잃은 채 휘청이고 있다. 그 사이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내의 몸이 겹쳐졌다. 밑에 깔린 사내가 낮게 신음을 내뱉었다.
“윽...”
술병에 남아있던 술이 흘러나오며 어깨 부근을 흠뻑 적셨다. 옷에 가려져 있는 줄도 몰랐던 근육과 잔해가 옷에 비쳐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젖어 들어가고 있는지 몰랐다. 저보다 몸집이 우람한 사내 밑에 깔려 정신이 없었으니. 위에서 짓누르는 압박감에 숨이 턱 막혀왔다.
“좀 아픈데.”
무겁고 답답했다.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리저리 발버둥을 쳐보았으나 소용 따윈 없었다. 한숨을 폭 내쉰 사내는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행색은 영락없는 사내였으나 눈만 봤을 땐 크고 맑은 눈망울이 마치 여인인 것도 같았다. 제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사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 외관에 홀린 저가 문제인가.”
넋을 놓을 만큼 출중한 외모가 문제라면 문제였다. 하지만 제일 큰 문제라면 갑자기 자신을 껴안은 이 사내의 행동이었다. 그 품에서 벗어나려다 그만 발을 헛디뎌 중심을 잃어버렸다. 고요한 빗소리와 함께 제 위에서 곤히 잠든 사내의 숨결만이 방 안을 곧이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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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에서 내로라하는 기방, 화월관엔 최근 유명 인사가 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환골탈태라는 별칭을 가진 화공이었다. 기생도 아니고, 어째 이름도 얼굴도 없는 것이 왜 유명 인사가 되었을꼬. 환골탈태처럼 그림을 그려준다는 의미가 담긴, 간단히 줄여 환탈화공이란 별칭으로 불리는 화공. 그 화공은 다른 화공들과 별 다를 바 없는 그림 실력을 지녔다. 다만 그 화공의 그림은 어딘가 달랐다, 아니, 특별했다.
넙데데한 얼굴은 갸름한 얼굴로, 까무잡잡하고 잡티 뿐인 피부는 희꼬 멀끔한 피부로. 작은 눈은 큰 눈으로, 낮은 코는 높은 코로. 붓놀림으로 얼굴이면 얼굴, 몸이면 몸, 배경이면 배경. 의뢰인이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려주었다. 그렇다고 너무 몰라보게 바꿔 그리진 않았다. 전에 한 번 된통 당한 뒤로부터.
시간을 거슬러 화공은 한 여인의 그림을 의뢰받았다. 여인은 서신으로 주고받던 나리가 있었으나, 서로 얼굴도 모른 채 어찌 서신만 주고 받을 수 있었던 건진 잘 모르겠다. 여인은 그 화공의 그림이 기막히단 소문을 듣게 되고, 화공은 그저 여인이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린다. 완성된 그림을 본 여인은 흡족한 미소와 함께 나리에게 서신을 보냈다.
나리는 당장 여인을 만나고 싶었으나, 만나고 나선 어째 나리가 여인을 못 알아보는 게 아닌가. 당연히 알아보지 못할 만도 했다. 그림의 여인은 눈앞에 보이질 않고 웬 다른 여인이 앉아 있으니 말이다. 나리는 뒷걸음칠과 줄행랑을 연속했고 상처받은 여인은 모든 걸 다 화공 탓으로 돌려 한동안 달래주느라 애썼다고 말을 전했다. 결국 돈은 돈대로 사라지고 여인에겐 온갖 욕을 들어야만 했다.
이 일을 교훈 삼아 실제와 다른 모습으로 그려주는 것은 위험하단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티가 날 듯 말 듯 변화를 주는 것은 여간 쉬운 일도 아니었기에 그런 힘든 수련을 거치고 나서야 화월관의 유명 인사가 되어있는 것이다.
“환탈화공!”
그것도 낯간지런 별칭과 동반되어 말이다
“그래 부르지 말라니까.”
붓 정리를 하고 있던 해월이 화들짝 놀라 꽥 소리를 내질렀다. 문 앞에 선 청아가 그런 해월의 반응이 재밌는지 호탕하게 웃었다.
“봐라, 머스마야. 그 이름 덕에 이번에도 이래 그림 의뢰가 또 들어왔잖아.”
청아는 손에 들고 있던 서신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낯간지런 별칭은 언제 들어도 여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 별칭 덕에 그림 의뢰가 많이 들어오는 것도 사실이었다. 해월은 반박할 수 없었기에 끙, 하고 머리를 짜냈다.
“헌데 신기하네.”
“무어가?”
“이번 그림 의뢰인 말야.”
청아가 의아한 듯 말했다. 서신을 건네받은 해월은 정리하던 붓을 내리놓고 서신을 펼쳤다. 오늘 날짜가 보란듯 적혀 있었다.
“사내다?”
“으응?”
“것도 엄청 멀끔히 생긴 나리.”
“참말이야?”
이상하게도 의뢰인 모두가 다 여인이었다. 아마 본래 모습보다 아름답게 그려준단 소문이 퍼져 있다 보니, 여인들에게 관심이 높았던 모양이다.
“이제 한양댁 사내들도 내 그림이 궁금할 때 되었지!”
해월의 농담에 청아가 피식 웃었으나 이내 곧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너 의뢰인 만나는 거, 나도 같이 가면 안 되나.”
“뭐? 절대.”
해월이 단호하게 말했다. 해월의 그림 철칙 중 하나는 그리기 전 우선 의뢰인을 파악하는 일이였으므로 남이 끼는 걸 그저 즐기진 않았다.
“너도 알잖아. 누구 하나 더 있다고 속마음 털어놓기 쉽지 않다는 거.”
“알지, 알지...”
“그러니 절대 안 돼.”
“그치만, 너무 늦은 때에 만나는 거 아냐?”
“매번 이때 의뢰인이랑 만났는데.”
더는 할 말을 찾지 못한 청아가 끄응 거리는 소릴 냈다. 물론 의뢰인이 원하는 시간대와 장소가 있담을 알지만 장소는 대부분 화월관 별관이었고, 늦은 시각은 해시였다. 몸과 정신이 탁 풀리는 시간대. 어둡고도 조용하지만 편안한 시간대는 속마음을 잘 드러낼 수 있다 생각하였다. 아무에게도 말 못 할 비밀을 누구나 하나씩은 간직하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사내랑 단둘이! 그것도 늦은 시각에 만나는 건 쫌... 위험해.”
“하이고! 이보세요, 이래 봬도 나도 꽤 사내라고!”
해월이 콧방귀를 뀐 채 가슴에 손을 턱 올리며 말했다. 청아가 쉽게 걱정을 떨쳐내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해월 또한 한 치도 양보치 않았다. 청아는 화월관의 기녀이자 그림 중개인이었다. 또한 친우이자 해월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해월은 사내가 아닌 여인이다. 살고 싶어서, 살기 위해 여인의 길을 버린 채 사내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제 본을 버린 채.
“네가 무슨.”
청아가 어이없단 듯 해월을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어허! 그거 지금 사내에게 되게 실례되는 말과 행동이다.”
해월이 양손을 허리춤에 짚은 채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청아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행수 어르신의 목소리가 점점 크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행수 어르신인 갑다. 언능 가봐.”
해월이 여인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청아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화월관의 곽행수. 그녀의 도움으로 화월관에 머물게 됐고 붓을 다시 잡기 시작했으며 청아를 만나게 됐다. 만일 행수 어르신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 자신은 없었을 것이다.
“걱정 마. 별일이야 있겠어?”
해월이 씩 웃으며 청아를 달랬다. 청아는 못 이기겠단 듯 고갤 좌우로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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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방을 은은히 밝히는 주황 불빛이 흔들리고 있다. 바닥엔 화방 도구가 흩뿌려져 있으며 한가운데엔 술상이 떡하니 놓여 있다. 다짜고짜 당신의 비밀이 뭐냐 물을 수 없기에 시간을 갖고 의뢰인이 자신을 편하게 생각해야만 했다. 긴장을 풀기 적합한 건 술만 해도 족하다. 헌데 지금은 저가 저 술을 입에 모조리 삼켜버리고 싶었다. 청아에게 걱정 말라고 자신만만히 말했지만 막상 만날 순간이 다가오니 입이 바싹 말라갔다.
“청아가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해선...”
청아가 지레 겁먹어 덩달아 저 또한 겁을 먹은 것 같다. 설마 무슨 일이야 나겠나. 해월은 한숨을 후 내쉬며 의뢰인을 기다렸다. 촛농이 뚝뚝 떨어짐과 동시에 저의 심장 고동 소리도 맞춰 똑같이 흔들렸다. 한데 손꼽아 기다려도 의뢰인은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이상함에 고갤 갸웃거렸다.
“여길 못 찾는 건가?”
화월관이 워낙 크고 넓어 헷갈릴 순 있으나 대부분은 곧잘 찾아왔다. 관 옆엔 큼지막한 나무가 한 그루 있었으니. 밖에 나가 죽치고 있어야 했나, 아니면 청아를 찾아 의뢰인이 어찌 생겼는지 물어봐야 하나. 해월이 고민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문은 해월의 시선과 함께 드르륵, 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