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 / BL요소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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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7 11:17조회 47댓글 0세리아
- 뭔가 기억나는 거 없어요?

하는 물음에 서이한은 그냥 입 꾹 닫고 말았다. 머리가 텅 비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진 말인 것 같았다. 듣기로는 수영장 대리석 바닥에서 미끄러져 머리부터 부딪혔다는데, 넘어진 기억은 커녕 최근 삼 년 동안의 기억조차 전부 없었다. 서이한은 뇌출혈까지 온 것치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억 상실 증상만 보인다고 말하는 의사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삼 년 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괜히 거대해진 몸뚱아리만 원망스러웠다. 붕대로 감싼 머리가 지끈거렸다.

- 의사선생님, 기억이 복구될 가능성은 전혀 없는 건가요?

서이한 손 꽉 붙들고 제 엄마가 간절하게 물었다. 대답은 희망차지도 절망적이지도 않았다.

- 사고때 기억상실이 발생한 거면 가능성이 있긴 하겠으나 수술 중에 잘못된 거라면 거의 불가능하다 보셔도……

엄마는 거의 실신할 것처럼 울었다. 삼 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수영장 바닥에서 넘어진 것이라면 얼마 전 시작한 수영을 아직까지 붙들고 있었다는 뜻인데, 기억 잃으면서 수영 실력이라도 같이 잃어버린 거면 그건 좀 아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 기억 속 서이한은 수영을 시작한지 고작 한 달 만에 방금 막 수영 입시 전문반에 이름을 올린 역대 천재였다. 서이한은 수영에 대해서는 그렇게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취미였으니까. 지금은 고등학교에까지 올라갔으니 다른 애들처럼 공부나 열심히 하고 있겠지 생각했다.

근데 나중에 듣기로는 유소년부 일 등이었단다. 전국 대회만 나갔다 하면 금메달을 목에 걸고 곧 국가대표에도 선발될 거라는 엄청난 기대주.

얼마 지나지 않아 동료라는 사람도 병원에 찾아왔다. 이름은 윤태성. 아직 고일인데도 키가 백팔십오가 넘고 덩치도 컸다. 고작 중일 기억 갖고 있는 서이한은 윤태성 보고 솔직히 조금 쫄았다. 윤태성은 심문하는 것처럼 서이한에게 뭔갈 꼬치꼬치 깨묻더니 전부 기억 안 나는 말을 듣고 나서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어떤 사이였는데.

그렇게 말하는 윤태성은 그냥 동료 사이였다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슬퍼 보였다. 만년 이 등, 이태성. 그게 선수권에서 윤태성 별명이었다고 한다. 맨날 이 등만 하고서는 일 등 옆에 착 붙어서 만족스럽다는 둥 웃기만 했던 남자였다. 서이한이 금메달 메고 나온 사진마다 윤태성은 옆에서 은메달 메고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이등과 일등 사이의 경쟁전 같은 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서이한이 수영 시작하기 전까지는 엄청난 기대주였다는데 밀려도 속상하지도 않나. 적어도 윤태성은 수영보다 서이한을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억을 되살리겠다는 명목으로 사진들을 수도 없이 봤다. 서이한 사진보다 윤태성 사진을 더 많이 본 것 같았다. 윤태성이랑은 도대체 무슨 사이였길래. 윤태성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서이한은 답답해도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땐 시원하게 수영이나 좀 해줘야 하는데.

- 머리가 생각보다 많이 다쳤어요. 앞으로 몇 달 동안은 운동하면 안 됩니다.

서이한은 강제 운동 정지 명령도 받았다. 수영 실력이 퇴화했는지 확인할 방법도 없어 억울했다. 심지어 한 달 뒤면 서이한이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던 국가대표 선발전 경기도 있다던데 꼼짝없이 누워있기만 하게 생겼다.

윤태성은 매일같이 병실에 찾아왔다.
언제는 꽃다발 들고, 언제는 다 마르지도 않은 머리로 수영가방 메고선.

매일 보니 그 얼굴도 퍽 반가웠다. 만날 때마다 익숙해져 이젠 어느정도 편한 사이가 됐다. 윤태성은 아직 기억을 잃은 서이한이 어색해 보였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서이한은 윤태성이랑 친해지고 싶었다. 기억은 돌아올 기미도 없으니 이 상태로라도 친해져야 하는데 그 사이에 있는 벽은 도무지 허물어질 생각을 보이지 않는다.

윤태성은 서이한 그 자체에도 집착했지만 과거 그 기억에 더욱 집착했다. 프루스트 현상이라는 말엔 과거에 쓰던 향수까지 가져와선 병실에 잔뜩 뿌려대서 며칠동안 냄새가 사라지지 않았던 적도 있다. 향이 지독해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던 걸 보니 과거에 진짜 좋아했던 향순가 싶긴 했지만 원래 의도였던 기억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니 윤태성도 반쯤 포기하고 만날 때마다 혼자 과거 얘길 지껄였다. 네가 얼마나 수영을 잘했었는지 아니, 네가 수영하는 걸 볼 때마다 내가 다 기뻤는데, 수영장 일 층에 누렁이 고양이를 참 좋아했었는데 요즘 두 마리로 증식했다는 둥.

그러다가 윤태성은 내가 본 이래 처음으로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 내일 선발전 있다. 그거 네가 진짜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쉽지.

윤태성은 미묘하게 웃는 것 같기도 우는 것 같기도 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너 없으면 내가 무조건 일 등인데.

그러고선 입장권 한 장을 건네주며.

- 구경오는 건 할 수 있잖아. 코치님이 너한테도 꼭 전해달래. 나 수영하는 거 보면 기억 찾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말했다.

서이한은 기억이 그렇게 쉽게 돌아올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씩 웃고 말았다.

다음 날 혼자 찾아간 수영장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넓었다. 구경꾼도 선수도 많아서 복잡하고 시끄러운 곳에서 서이한은 맨 앞 줄에 앉았다. 좋은 자리도 잡았구나 싶었다.

대기 시간은 지루할 정도로 길었다. 따분하게 핸드폰이나 바라보고 있으려니 경기가 시작된다고 했다. 경기는 선수당 한 번으로 끝난다. 예선은 전에 이미 치뤘다. 본선에 올라온 건 고작 열여섯이 전부였다. 두 번 경기하면 끝난다. 백미터 수영은 그렇게나 시시했다.

윤태성은 맨 처음으로 대기실에서 나왔다. 첫 번째 레일이었다.

윤태성이 스타팅 블록에 올라 스트레칭하며 서이한을 바라봤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내가 저 옆에 있었댔지. 아직까지도 저렇게 커 보이는 사람들과 경쟁해 이겼다는 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선수 한 명씩 입장할 때마다 수영장 물 속을 덮은 긴장감이 고요히 아른거렸다. 윤태성은 청소년 선수들 중에서도 가장 큰 몸으로 바깥쪽 레인에 서서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일 번 레일은 불리할 텐데 저렇게 든든할 건 또 뭐야.

휘슬 소리가 울리고 선수들이 일제히 풀장으로 몸을 던졌다.

온 세상이 멈춘 것처럼 그들은 느리게 착지했다. 물 속 깊은 곳으로 잠수하자 파동이 동심원으로 흩어지며 허공에 물방울이 튀었다. 주변이 시끄러웠던 것도 같은데 서이한은 물 소리밖에 듣질 못했다.

그 순간 온 경기장에 익숙한 락스 향이 확 풍겼다.

제각각 다른 헤엄으로 물결처럼 흘러가는 선수들은 그 자리에서 자유로워 보였다. 떠밀려오는 물살 사이를 가르며 윤태성이 우뚝 선두로 튀어나간다. 물 같은 건 가르면 그만. 그런데 잊어버린 기억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사방으로 튀는 가파른 물살이 왠지 제 팔을 스치는 것 같다. 저 경기장 틈새에서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로서 거대한 수영장을 가로지르던 감각이. 서이한은 어두운 뇌 틈속에서 한 가지 잊었던 기억의 파편을 떠올렸다.

수영은 부드러운 운동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어떤 것보다 역동적인 활동이었다. 뭍보다 강한 압력을 견뎌내며 인간의 영역 밖으로 벗어나려는 어떤 의지 같은 것이 두 팔에 담긴다. 윤태성의 손끝이 제일 먼저 터치패드에 닿았다. 압도적인 기록이 전광판에 찍힌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서이한의 눈에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

두 가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었나.

한 가지는 수영. 윤태성이 물안경 벗어던지고 전광판을 슥 보더니 미소짓는다.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준 그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경기의 주인공임이 분명했다. 윤태성이 드디어 일 등 했다. 곧바로 두리번거리며 날 찾는 눈은 유리처럼 맑게 빛나고 있었다. 이내 날 발견한 윤태성 얼굴에 일 등 한 걸 알았을 때보다 더 큰 미소가 번졌다. 난 그만 울고 말았다.

남은 한 가지는 아득한 첫사랑.

윤태성 눈에 수영장 물이 비쳐 파란 빛깔이 어른거렸다. 환호 소리가 들려오고 윤태성은 손가락으로 서이한을 가리킨다.

서이한은 그토록 간절했던 적이 없었다. 기억하고 싶어. 모든 기억을 되찾고 싶어. 제발. 정신을 잃기 전 우린 도대체 어떤 사이였는지.

내가 본 너의 초련初戀이 파랗다.







/아직 퇴고 안 한 글이라 나중에 좀 더 고치고 다시 올릴게요
익명분들이 좋아하시는 글 스타일이 뭔지 아직 감이 안 잡히네요 좋아하는 글 있으면 댓글로 말해줘요 비슷한 스타일로 들고옴

큐리
https://curious.quizby.me/Se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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