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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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7 18:16조회 59댓글 4미키
립지와 공읽이의 기묘한 과외
“자, 오늘 읽어줄 페이지는 247쪽, 중세 봉건제의 붕괴다. 목소리 톤은 1.5배속 ‘차분한 지성’ 모드로 간다.”
공읽이가 안경을 고쳐 쓰며 태블릿을 켰다. 그는 이름 그대로 세상의 모든 텍스트를 가장 듣기 좋은 목소리로 읽어주는 인간 오디오북이었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전교 꼴찌 미키를 이번 기말고사에서 구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거대한 장애물이 있었다. 바로 미키의 단짝, 립지였다.
“야, 공읽아! 그 톤은 너무 졸려. 힙합 비트 좀 깔아봐. ‘중-세-봉-건! 둠칫둠칫!’ 어때, 귀에 쏙쏙 박히지?”
립지가 책상을 드럼 삼아 두드리기 시작했다. 립지는 세상의 모든 상황을 추임새와 비트로 해석하는 재주가 있었다. 미키는 그 사이에서 멍하니 입을 벌린 채 펜을 돌리고 있었다.
“립지, 이건 랩 배틀이 아니라 역사 공부야. 미키, 집중해. ‘장원의 해체는 농노의 지위 향상으로 이어졌으며…’”
“에이, 노잼! 미키야, 농노가 프리덤(Freedom)을 얻었다잖아! 렛츠 파티! 요!”
립지가 미키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자, 공읽이의 미간이 떨렸다. 논리와 리듬, 상극인 두 사람이 미키라는 하나의 타깃을 두고 충돌하고 있었다.
“잠깐, 둘 다 멈춰봐.”
드디어 주인공 미키가 입을 열었다. 미키는 공읽이의 교과서와 립지의 손바닥을 번갈아 보더니 씨익 웃었다.
“공읽이가 읽어주는 문장에 립지가 비트를 넣으니까, 왠지 연대표가 춤추는 것 같아. ‘1348년 흑사병’ 부분은 좀 더 다크한 비트로 해줄 수 있어?”
공읽이와 립지는 잠시 서로를 쳐다봤다. 불협화음일 줄 알았던 두 사람의 특기가 미키의 기묘한 수용력 안에서 합쳐지기 시작했다. 공읽이는 명료한 발음으로 지식을 뱉었고, 립지는 그 지식의 강조점마다 기가 막힌 추임새를 넣었다.
그날 밤, 미키의 방에서는 공부인지 공연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시험 범위 끝! 미키, 이제 좀 이해가 가?”
“응! 근데 내일 시험지 보면 왠지 춤춰야 할 것 같아.”
공읽이는 한숨을 내쉬었고, 립지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세 사람의 우정은 그렇게 지식과 리듬 사이 어딘가에서 단단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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