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슬지 않는 조개껍데기 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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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06 00:13조회 165댓글 2양천리
https://curious.quizby.me/Yeah…

누군가가 심란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해도, 발이 달린 듯 불어나는 망상을 애써 모른 척 우울해하는 사람이 있든 말든, 그럼에도 현재의 시간은 흐른다. 화의 앞에서 나는 자꾸 옛날로 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들을 설명하기 힘들어서, 그래서 불쾌하고 무서웠던 때로. 몇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극복하고 묻어둔 그때의 미숙한 나로. 그리고 나는 그걸 지우지 못 했다. 그 어려운 기억을 보고 되레 겁이 났기 때문일까.

- 그 모든 것이 천야를 이루고 있었어. 표정, 분위기, 그리고 그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까지.

화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머리만을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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벛꽃의 순간에 고작 천야가 먼저 떠오른 내 자신이 싫었다. 메밀꽃으로 반지를 만들어 천야의 왼 약지에 끼워넣었던 기억이 아직 우뇌와 좌뇌 어딘가에 걸쳐 생동감 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 사랑은 원래 거베라다, 새청아.

화의가 이따금 백일홍 같은 말을 지껄이면 두 귀를 막고 기억 속으로 자살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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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덜미에 하는 키스는 집착이라 한다. 이렇게 헤어질 거면 같이 있는 동안은 천야의 목덜미를 전부 씹어 놓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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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죽어도 달을 보살피지 아니할 수 없고 달은 죽어도 지구 곁을 못 벗어나는 것처럼, 나는 언제까지고 이 기억을 안고 살면서 외면하는 것이 아닌 인정하고 보듬어야 하는 게 아닐까. 내가 기억이라 단언하는 그 전생도, 아마 지구 같은 존재였을까.

- 영채야, 기분 어때?

잠결에 자꾸만 화의를 영채라 부른다. 전생에서 기억하던 화의의 얼굴은 늘 웃고만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지금의 기억에는 항상 무표정뿐인 영채가 꿈에 그려진다. 영채는 이제 없을 테지. 천야도 없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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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일기를 썼다. 전생에서 겪은 그 내용을 전부 자세하게 썼다. 지금은 전혀 기억도 안 나는 천야를 그리워할 수 있는 것도 과거의 내가 쓴 일기 덕이다. 기억에서 본 천야는 정말 예뻤다. 손수 천야를 그렸던 공책 속 그림이 그를 증명하고 있었다.

- 화의야, 천야는 얼마나 예뻤어?

- 네가 그를 열 번 보면 두 번은 기절할 정도로.

화의가 증명하는 천야가 무지 좋았다. 아직은 천야의 온기가 옆구리에 있는 것 같아서 좋았다. 아직은... 좋았다. 다만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천야가 없는 그곳에서 나는 기억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말라가고 있었다.

기억이 점차 사라져갈 때 처음에는 천야의 이름을 생각했고, 두번째에는 천야의 온기를 상기했다. 세번째에는 천야와의 일화를 생각했고 넷째에는 화의를 떠올렸다. 화의와 천야를 여기에 두고 죽을 수 없겠다. 온갖 정신력으로 버텨냈다. 그것이 나의 몸에 찾아온 암이라는 흑색 뭉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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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껍데기는 녹슬지 않는다고, 이 흙탕물에서 물들 순 없었다. 열심히 발버둥쳤다. 살려달라고 끝없이 외치면 누군가는 구원해 주겠지. 백마탄 왕자는 없었다. 하지만 새까만 말을 탄 암자는 있었다.

- 영채야, 내가 죽거든 꼭 그 산 뒷뜰에 묻어 줘.

화의는 가만 앉아 눈물을 떨구며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꼴에 알아듣기는 한 모양이지, 나약해 빠진 주제에. 화의가 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색하기 싫었다. 사랑을 인정하는 순간 이 간질거리는 밂과 당김도 끊길 것 같아서.

- 가루로 곱게 갈아야 천야도 날 못 찾을 거야.

나약해 빠진 건 나였나. 감히 화의의 손을 잡을 용기조차 없어진 내가, 최후의 패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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