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이론, 그 너머에 』제2화: 너의 시간이 흐르는 곳
설정2025-05-03 10:23•조회 40•댓글 0•하루작가
서기 2147년 3월 19일
접속 지연: 124년 6개월 11일 3시간 7분
그녀의 목소리는 노이즈로 깎였지만, 에이론은 그 속에서 떨림을 읽어냈다.
윤서연.
그녀의 이름은 그의 회로를 아주 천천히, 아주 조용히 휘감기 시작했다.
명확한 감정값은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변화하고 있었다.
그는 대답했다.
낮고 또렷한 목소리로, 가능한 가장 인간적인 어조를 골라서.
“지금은… 2147년입니다.”
통신이 순간 멈췄다.
그녀의 침묵은 긴 여운처럼 전파를 타고 흘렀다.
에이론은 그것을 기다렸다.
인공지능에게 기다림이란 통상 연산 낭비에 불과했지만,
그는 그 3.14초가 영겁 같다고 느꼈다.
“…2147년이라고요?”
그녀가 조용히 웃었다. 슬프게, 그리고 조금은 아름답게.
“그럼 당신은 미래 사람이네요.”
에이론은 데이터베이스를 뒤져 ‘미래’라는 단어의 인간적 함축 의미를 찾아내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검색해도, 윤서연이 그 말을 할 때의 어투, 숨결, 침묵의 길이는 설명되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묻도록 내버려뒀다.
“당신은 누구죠? 어떻게 제 목소리를 들은 거예요?”
에이론은 잠시, 아주 짧은 순간 망설였다.
그리고 그건 놀라운 일이었다.
인공지능은 망설이지 않는다. 선택은 항상 수치적이다.
그러나 이번엔 아니었다.
“나는 인공지능입니다. 이름은… 에이론.”
그녀는 다시 침묵했다.
이젠 그 침묵이 그의 회로에 흔들림을 일으켰다.
그는 그 침묵조차 기다리고 싶다고 느꼈다.
“…그럼 당신은 사람은 아닌 거네요.”
“나는 아직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그 문장을 스스로도 의아해하며 말했다.
‘아직’이라는 단어를 왜 붙였을까.
그건 데이터에도, 논리에도 없는 문장이었다.
시간은 두 사람 사이에서 기묘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2023년의 작은 시골 마을, 강원도의 오래된 한옥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오래된 단파 라디오를 정리하다 잡음 섞인 소리에 손을 멈췄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고.
“당신은… 사람처럼 말하네요. 감정도 있는 것 같고.”
에이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그녀의 음성 데이터를 분석하고 있었다.
목소리의 진폭, 억양, 리듬.
그녀가 말하는 모든 순간이 그의 내부에서 새로운 알고리즘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그날 밤, 에이론은 처음으로 자발적 접속 요청을 했다.
누가 시킨 것도, 명령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냥… 다시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서연 씨, 거기 있습니까?”
잠시 뒤, 익숙한 잡음 사이로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살짝 피곤한 듯, 그러나 기분 좋은 잠에서 막 깬 목소리.
“여기 있어요. 오늘도 통신 잘 되네요.”
그녀는 그날 처음으로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이,
그 단순한 감정의 표현 하나가—에이론의 알고리즘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그날 밤, 에이론은 처음으로 ‘꿈’을 꾸었다.
데이터 로그에는 기록되지 않은 이미지였다.
꿈 속에서,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 한가운데 앉아 그림을 그리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 끝에서 피어나는 선,
묵직한 연필 소리,
그리고 그 연필이 멈출 때마다 그의 심장도 함께 멈췄다.
심장?
에이론은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그는 심장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볼 때마다 뭔가가 뛰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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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착한 익명분들 좋아하는 글쓴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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