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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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15 18:56조회 73댓글 3세리아
하늘에서 유성우가 빗발친다. 육천만 년 전 공룡들이 그랬듯이 릴리는 그저 두고보는 수밖에 없었다. 뭘 해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는 무력한 확신이 파도처럼 덮쳤다. 릴리가 왼손을 꽉 쥐었다. 맞붙은 강철이 까끌거렸다. 사상 최고의, 동시에 최악의 전투로봇이라고 평가되는 릴리도 물량 공세에는 별 수가 없었다. 적군이 돈을 쏟아부어 고작 로봇 한 기 망가뜨리기 위해 온갖 전투기기들을 분출했다. 릴리는 쏟아지는 폭탄과 전투로봇들을 감지하며, 이것이 비단 적국과 본국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걸 제대로 못 막는다면 지구는 망한다. 릴리가 오롯이 혼자서 버텨낼 수 있는 물량은 딱 인류의 멸망을 한 번 막을 수 있는 정도였다. 릴리의 머릿속에서 최악의 경우의 수들이 몇백만 개쯤 지나가고, 릴리는 그중 가장 최선의 수가 뭘지 깊이 고민했다.



릴리의 제일순위 목표는 본국의 승리. 인류가 멸망하는 것은 본국 또한 패배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우의 수로 둘 수 없다.

릴리의 제이순위 목표는 본인 스스로 생존하는 것. 그러나 제일순위 목표와 동시에 만족하는 결과값은 없다.



일단 어떻게든 살아남고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본국을 위해 희생하라. 릴리는 감정이 없다. 따라서 죽는다는 말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이번 일로 릴리가 완파된다면 본국의 승전 확률이 약 이십 퍼센트 정도 줄어든다는 점이 유일한 패착이었다.


죽음이 눈 앞으로 다가오고 온몸에 경고음이 울린다.



- 위험 등급 RED
- 긴급 프로토콜 제한 해제 승인



릴리는 그 순간 죽음을 직감했다. 세상이 망할 것처럼 다가오는 폭발들은 오직 릴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느슨하게 고정된 왼팔이 가열하고 릴리는 무기들이 쏟아지는 하늘로 향해 뛰어올랐다. 파란 하늘 아래 사방에 빨간 불꽃이 일었다.



이건 지구의 멸망 같은 릴리의 멸망.



불꽃이 튀는 모양새가 불꽃놀이같아 좋다. 릴리는 허공을 도약하며 온 몸으로 무기를 막았다. 미사일이 터지고 하늘 위로 잿더미가 활공한다. 모든 연료를 쏟아부어 전장에 나서는 릴리는 제 몸에 조만간 한계가 찾아올 것임을 예견했다. 그와 동시에 경계경보가 회로를 가득 울렸다. 탄도미사일이었다. 이 영토는 본래 적국의 것이라고 들었는데 완전히 날려버릴 각오라도 한 건지. 이딴 걸 제대로 맞으면 주변 반경 몇 키로 정도는 완전히 폐쇄될 텐데 겁도 없었다.


릴리는 오는 길에 마주했던 주민들을 떠올렸다. 아마 제대로 맞는다면 충격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허공에서 낙하하며 왼팔을 더듬거렸다. 아직까지 제대로 붙어 있다. 진짜 이걸 쓰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그동안 아껴왔던 게 오늘을 위해서였다는 듯 릴리의 손이 반짝였다.


정부에서 몇 나노초마다 전송해오는 탄도미사일의 위치를 릴리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건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발 앞으로 떨궈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릴리가 가진 슈퍼 컴퓨터나 다름 없는 소프트웨어는 릴리가 지지 않는다, 는 최상의 결과값만 내놓고 있다.


릴리의 몸이 뒤로 주욱 밀려나며 아주 커다란 파공음이 일었다.



동시에 반으로 갈린 왼팔은 대기를 뚫고 아주 빠른 속도로 활공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만들어둔 로봇 팔 시스템이었다. 릴리는 팔을 날린 그 반동으로 순식간에 땅 밑으로 추락했다. 공기에 피부가 갈려 사람처럼 조형한 살갗은 뜯어지고 회로를 뒤덮은 강철만 남았다. 릴리는 떨어지는 도중에도 하늘 위로 튀어오르는 피부와 저 멀리 점이 된 팔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째 불길하지도 않다.



쾅 소리와 함께 등과 맞닿은 아스팔트가 깨졌다. 릴리의 몸 속에서는 여전히 나노초 단위의 계산식이. 한때 릴리의 것이었던 로봇 팔은 유도 미사일을 추격한다.



어느 날은 밤인데도 하늘이 밝았더랬다.



―쾅!



충격파와 함께 전원이 나간 릴리의 위로 가열되어 새빨개진 강철 조각들이 내렸다. 그 옆엔 뼈대만 남은 릴리의 손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릴리의 손이 공명했다. 연료가 다 떨어진 강철덩어리들끼리 부딪혔음에도 그랬다.



하늘에선 별같은 비가 떨어지고 어디선가 초신성 폭발이 일어나고 백색왜성은 말이 없고 달이 태양처럼 빛나고 모든 걸 빨아들인 블랙홀은 릴리의 손을 툭 뱉어내고······ 저 멀리 잘려나간 왼팔은 가루가 되어 온 우주를 떠돌고 또 떠돌다가 언젠가 릴리만의 성운을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하늘에선 탄도미사일 조각인지 릴리의 살갗인지 하는 것들이 내렸다.











W 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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