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질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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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1 20:40조회 26댓글 1유하을
처음부터 흐리고 있었다.
날씨도, 마음도.

비는 예고 없이 쏟아졌다.
그 순간 알았다.
오늘은, 무너지는 날이구나.

지하철 창문에 얼굴을 비췄다.
잘 모르겠는 얼굴이었다.
눈 밑은 짙게 꺼져 있었고, 입술은 굳어 있었다.
괜찮은 척하다 굳어진 표정은 결국 본래의 표정이 된다.
그게 버티는 법인 줄 알았는데,
가끔은 그 표정이 너무 낯설었다.

이어폰을 끼고 아무 음악도 틀지 않았다.
조용함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조용한 척을 하고 싶어서.

회사에 도착했다.
누구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적당한 인사, 적당한 표정, 적당한 속도.
모두가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아무도 티 내지 않을 뿐.

책상에 앉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늘 사라진다면,
정말로 누가 알아챌까.

점심시간.
일부러 늦게 나갔다.
밥을 먹는 건지 씹는 건지 모르겠는 시간.
다 삼킨 후에야 속이 텅 비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채우는 게 아니라, 비워지는 기분이었다.

퇴근길, 비가 더 거세졌다.
우산 없이 걸었다.
젖는 게 싫지 않았다.
몸이 먼저 무너지면, 마음은 조금 덜 아플지도 몰라서.

집 앞에 도착해도 불을 켜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전화는 오지 않았고, 문자는 없었다.
침묵은 습기처럼 스며들었고,
나는 천장을 보며 숨을 쉬었다.

그 순간, 갑자기 울컥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

비는 계속해서 내렸다.
천천히, 조용히,
무언가를 쓸어내리듯.

그리고 나는,
아무 말 없이 무너졌다.

그게, 오늘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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