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퍽질퍽열병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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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8 18:48조회 139댓글 16유건
병실에 놓인 디퓨저가 깨진 채 차가운 바닥을 뒹굴었다. 바닥에 번진 액체에서 진한 디퓨저 향이 났다. 그 향은 병실을 가득 매웠다. 너무 독해서 머리가 아팠다. 지끈거려. 머리가 아픈 건 디퓨저 향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찾아왔다. 누나도 없고 개새끼도 없는 병실에. 바닥의 액체가 잔뜩 질퍽거렸다.
질퍽질퍽질퍽질퍽질퍽질퍽질퍽······.

만취 상태로 인해 벌어진 실수. 와인병을 테이블에서 떨어트렸고 그 병에 우연히 아들이 맞았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고 아들은 폰을 가지러 기어가다 정신을 잃었다. 아버지는 폭행을 그렇게 마무리했다. 감옥에 처넣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무기 징역도 그 안에서 자살하지 않는 이상 나에겐 재산이 상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런 인물도 아니고.

아버지를 감옥에 넣은 불효자에게 남은 건 버려짐이기에 눈을 꾹 감고 아버지의 누명이 억울하다는 호소를 했다. 아니 나는 진짜 연기를 해야 된다니깐? 물론 그러다 욕을 하고 싶은 걸 속으로 꾹꾹 참아야 했다. 존나 현타가 왔다. 내가 어쩌다 이런 개고생을 하고 있는지. 시발. 일을 처리하려고 분주한 아버지를 보니 구역질이 났다.

미열이 나서 약을 먹고 3시간을 자고 일어나니 개새끼가 없었다. 어디갔지, 잠시 생각하다 은연에 오늘 학원 보강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플레이리스트를 틀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병실에 적막이 가득했다. 몸에 느껴지는 열이 갈팡질팡. 열이 오르는 모양이다. 그놈의 열. 이젠 익숙해서 감흥도 없다. 몽롱한 건 어쩔 수 없지만.


질퍽질퍽열병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창문 사이로 옅게 가을 바람이 불었다. 이불로 목을 싸매고 등을 돌려 누웠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병실 문이 열렸다. 개새끼가 온 건가. 바보같은 착각이었다.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손가락 끝을 지분거렸다. 이불 속도 추웠다. 개새끼에서 창문 좀 닫아달라고 부탁하려던 그 때.

묵직한 담배갑이 내 가슴 위로 날아와 퍽 하고 부딪쳤다. 그리고 내 앞에 정장을 입은 아버지가 서 있었다. 불길했다. 일이 잘 풀리지 않나? 그 생각을 한 이후로 개같이 맞았다. 네가 감히 날 신고를 하냐고. 내가 한 신고는 아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누나나 개새끼에게 잘못을 돌리는 건 죽어도 싫었다. 그래도 붕대를 두른 머리는 피해서 때렸다. 안 그래도 뜨거운 몸이 더 화끈거렸다. 창문 닫을 필요 없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간호사가 제지하러 오기 전에 아버지는 자리를 떠났다. 여전히 반듯한 모습과 얼굴에 띤 온화한 미소에 화가 치밀었다. 주먹을 꾹 쥐었지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역겨워서 속이 울렁거렸다. 하얗게 질려 헛구역질을 하는데 개새끼가 들어왔다. 능숙한 손길로 봉투를 내 입에 대주는 개새끼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 괜찮아.

- 뭐가 괜찮아?
- 방금 다 봤단 말이야···.

- 알아.

괜찮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아픈 몸으로 그렇게 맞았는데 괜찮지 않을수가 있을까. 그래도 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다. 내가 바본가? 그렇게 빼꼼 내다보는데 그걸 눈치 못 채는 게 더 대단하다. 울먹거리는 개새끼가 안쓰러워서 -자신이 가장 안쓰러운 상황임에도.- 씩 웃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우스운 표정이겠지만.

웃지 말라며 중얼거리는 개새끼는 눈물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떨었다. 그 입술을 삼키고 싶었다. 떨림이 멈추게 물어버리고 싶었다. 개새끼는 눈가를 쓱 닦고 병실을 나갔다. 나가서 또 울겠지, 이 울보야. 개새끼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후다닥 옆에 있는 서랍에서 해열제 두 알을 꺼내 먹었다. 머리가 아팠다.

그날 밤은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몸이 뜨거워졌다, 차가워졌다를 반복했고 몸이 땀에 축 젖어 계속 늘어졌다. 입에서 알 수 없는 액체가 계속 흐르는 순간에도 나는 개새끼를 생각했다.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가 기절했다. 그러곤 다시 정신이 들었고 액체를 토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열이 내렸다. 주변에는 한눈에 봐도 지친 의사와 간호사가 있었고 누나가 옆에서 자고 있었다. 나 살아있나? 손을 내 눈 앞에서 움직였다. 오 살아있네. 죽는 줄 알았다. 누나가 깨기 전에 의사는 알 수 없는, 아니 사실은 딱히 궁금하지 않은 내용의 말을 뱉었다.

- 앞으로 생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 상태가 계속 이렇다면 다음에는 정말로,

- 사망하실 수 있습니다.

- ···네?

- 마음의 준비를 하시길 바랍니다.


죽음을 갑작스럽게 코 앞으로 다가왔다. 청춘의 시계 바늘이 날 기다려주지 않았다. 우리는 어떨까. 내가 널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우리는 어땠을까. 내가 여름마다 아프지 않았더라면. 너가 항상 간호해 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널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그 여름에 만나지 않았더라면. 달랐을까.

나는 아직
아무것도 전하지 못했는데.


나는 누나에게 부탁해 내 방에 박아둔 Mp3를 받았다. 펑펑 울며 그게 왜 필요하냐고 묻는 누나는 애써 외면하며. 이걸 쓸 일은 영원히 없을 줄 알았는데. 볼품없는 공책을 찢어 글을 써 내렸다. 꾹꾹 접어 해열제가 든 그 서랍에 예쁘게 넣었다. 그 안에 있던 해열제와 수면제는 모두 꺼내 쓰레기통에 버렸다.

더 이상 볼 일 없으니까.


뜨거운 게 모두 식었다. 나도.
그리고 우리의 □□도.

청춘?
열병?
··· 순애?


https://curious.quizby.me/ugun…

^ 퇴고 없어요 언젠가 마주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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