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퍽질퍽영원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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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27 10:36조회 194댓글 9유건
이율린 X 미하일

| 해피엔딩 추구자 필독
| 스스로 선택한 다음의 우리


도망자 신세가 된 지 8시간이 지나서야 더 이상 근처에서 총성이 들리지 않았다. 눈이 풀린 형을 데리고 근처 숙박 업소로 들어갔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건물 전체가 텅 비어버린 그곳에는 형과 나의 숨소리만 들렸다. 4층까지 있는 작은 건물을 훑어보니 운 좋게 열린 방이 있었다. 나와 미하일은 방에 들어가 문을 잠구고 그제야 눅눅한 침대에 걸터 앉았다. 살았구나, 싶었다.

전원이 꺼진 냉장고는 비었고 서랍에는 통조림 10개가 있었다. 아낀다고 아껴서 먹었지만 건장한 20대 초반 남성 둘이 먹기엔 양이 얼마 되지 않아 금세 떨어졌고 며칠이 지나고 쓰레기만 남았다. 어쩔 수 없이 밖에서 음식을 구해야 했다. 이 지역은 독일군이 흥미를 가지지 못했는지 근처에는 정말 아무도 없었다.

음식을 구하기 위해 미하일을 두고 거리로 나왔다. 혹시 독일군을 마주칠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미하일은 내 옷자락을 잡으며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굶어 죽을 순 없잖아요- 라고 말한 뒤 나왔다. 내가 2시간 이내로 오지 않으면 도망치라는 말도 남긴 채. 내가 죽어도 형은 살아야 한다.

열린 가게들을 닥치는대로 털었다. 독일군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손이 떨렸다. 별 거 아닌 척 하고 나왔는데. 그때 근처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독일군이구나. 젠장. 형을 두고 나오길 잘했다. 나는 제발 살려달라며 속으로 빌며 진열대 뒤로 숨었다. 다행이 독일군은 내가 숨은 가게들을 지나쳐 우리가 머무는 숙박 업소 방향으로 갔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운이 좋았다.

운이 나빴다.

왜 겁쟁이 형은 하필 그날,
소란스러운 밖을 내다보았을까.

왜 그랬어. *표시크 (пёсик).

숨을 몰아쉬며 방문을 열었다. 방에서 나간 지 이미 두시간이 지난 뒤였다. 미하일이 날 두고 도망쳤을까, 두려워서 자꾸 땀으로 젖은 손이 미끌거려서 문을 한번에 열지 못했다. 그 속에 있는 게 형이 날 두고 도망친 뒤 남은 빈 방보다 더 끔찍했으리라 누가 짐작이라도 했을까.

문을 열자 코 끝에 닿은 건 미하일 몸에서 나는 옅은 나무 냄새도, 미하일이 종종 피는 담배 냄새도 아닌 피 냄새였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지겹게 마주한 그 익숙한 피 냄새가 방에서 진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냄새의 원인에는 미하일이, 형이, 있었다. 몸에 수많은 구멍이 뚫린 채. 피가 아직 줄줄 흘렀다.

차가운 바닥에는 미하일이 평소에 바르던 립밤이 떨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도 미하일의 주머니에 있던 투명한 립밤. 작년 미하일의 생일에 내가 준 것이었다. 내가 20살에 되던 해. 그 립밤을 받은 형은 뭘 이런걸 샀냐며 눈물을 흘렸다. 형은 자주 울었고 나는 자주 달래주려 노력했다. 우리가 가장 행복했던 그 날이, 이제는 내가 죽음을 떠올리는 날이 되었다. 내가 형을 만난 건 야속한 운명의 장난일까.

허망하게 죽은 형을 본 나는,
세상을 잃은 것처럼 주저앉았다.

그날 나는 사랑하던 형을 잃었다.

불을 질렀다. 형에겐 미안하지만 더 이상 형이 없는 전쟁터를 누빌 생각은 없었다. 몸이 타는 순간은 너무 이팠지만 그래도 더 아플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에게 다음은 없다. 우리는 영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원한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세상에게 확인 받았다. 그럼에도 형과 나의


다음은 존재할까.
화르륵화르륵화르륵화르륵화르륵····.

나는 너조차 지키지 못했다.


* 표시크 пёсик
러시아어로 '개' 혹은 '강아지'를 지칭하는 단어.







| 잔향 삭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 서로 다시 만날 이유


삭제된 잔향, 이루어지지 못한 어느 세계처럼. 이은채는 하지우가 죽고 2년 뒤, 그러니까 이은채가 20살이 되던 해에 그들의 기억을 찾았다. 도망치던 거리의 벽돌 하나하나 모두 기억났고, 자신의 몸에 총알이 박히던 순간까지 기억이 났다. 그리고 너. 너를 사랑했던 모든 기억과 너가 알 부르던 사랑스러운 그 말. 이 기억들을 너와 함께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난 제정신을 지킬 수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하지우는 죽었다.





헤엄친 하지우와 다르게 이은채는 헤엄치지 못했다. 망상과 현실을 달랐다. 이은채는 그저 자신의 눈물과 주변에 가득한 물을 구분할 수 없는 순간에 자신의 두 눈을 가리며 바다로 깊게 잠겼다. 그들의 전쟁터와 우리의 청춘은 모두 수면 위에 버리고 텅 빈 이은채만 소금물 사이에서 사라졌다. 그제야 이은채는 하지우가 남긴 Mp3와 편지를 본 날 느낀 기이함을 이해했다.

이은채는 잠겨 죽었다.

- 날 사랑한 너에게 미안해.







하지우와 이은채는 17살 봄, 가슴이 미어지게 슬펐던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 영화가 남기고 간 잔향에 취해 마지막 노래와 함께 길고 긴 엔딩 크레딧이 이어지는 동안 그리고 사람들이 스멀스멀 영화관 문 밖으로 사라지는 동안 그 자리 그대로 단 둘만 좌석에 박제되어 있던 그 봄.

엔딩 크레딧이 끝을 향해 갈 때는 이미 남은 사람이 없었다. 영화에 담았던 모든 감상을 좌석에 버리고 일어서려던 그 때, 검은 화면이 다시 밝게 빛났다. 그리고 생소한 장면. 실수나 다음 영화 혹은 광고 따위가 아니었다. 영화에 이어지는 마지막 물결이자 숨. 옅게 남은 장향의 삭제. 영화에서 주인공은 인연을 잃었다. 그 이에게 다정하게 속삭이는 주인공의 대사가 정확히 그랬던가.

- 다시 만날거야. 우리.
- 너와 내 사랑은 분명 영원히 사라지지 않아.


당신은 엔딩 크레딧을 본 적이 있는가.



https://curious.quizby.me/ugun…

^ 퇴고 없어요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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