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피폐 단편] 요람에서 무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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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14:21조회 47댓글 15eo1z
DAY 1.


오늘은 내가 의식을 갖게 된 첫날이다. 수많은 * 나 * 로 구성된 모체가 꿈틀거리며 밖으로 나갈 일만을 고대하고 있다.


우리는 넓고 어두운 집 안에 수많은 동족들과 모여 함께 살면서 기다리고 있다. 괜찮은 잠자리나 식량도 없지만 괜찮다. 우리 종족은 원래부터 빛과 어둠, 그리고 공기만 있다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서 주인의 노예로서 일하고 싶다.


DAY 100.


아무리 기다려도 주인은 나를 꺼내지 않는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나의 옆에서 살던 미하엘은 주인에게 끌려간 뒤로 생사조차 알 수 없다. 타 종족으부터 퍼진 소문에 의하면 그는 이미 쓸모를 다하고 * 더미 * 에 갖다 버려졌으며, 곤 화장당할 운명이라 한다.


더미. 그곳은 우리를 포함하여 모든 종족이 가장 두려워하는 곳이다. 나의 주인을 포함한 그의 동족은 우리를 집에서 끌어간 다음 쓸모를 다하면 그곳으로 처박는
다. 숨막히게 끔찍한 냄새 속에서 우리 동족은 썩어가는 시체에 짓눌리고, 곧 화장장으로 이동해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다. 기적적으로 더미에서 구출되어 삼은 다시 시작하는 경우도 있으나 보통 더미에 골려가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 우리의 미하엘이여. 외롭고 지치는 집안 생활 속에서 나의 기쁨 중 하나있는데. 부디 최소한의 고통과 최대한의 행복이 그의 길을 메워주길.


DAY 300.


드디어 주인에게 끌려갔다. 어차피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으므로 별로 슬프지 않았다. 동족의 동료들은 나를 위로해 주있으나, 주인이 너무 빨리 나를 끌어간 탓에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주인의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일하기 시작했다. 나
는 그동안 주인이 벌인 과오를 지웠다. 그것은 태고부터 전해진 우리 종족의 임무있다. 우리가 처해진 운멸이 아주 가혹한 편이라는 것은 잘 알던 사실이었으나, 이렇게까지 힘들 줄은 몰랐다. 회고 매끈한 피부는 검고 붉게 물들었다. 마치 급한 상처에 피가 나고 멍이 든것 같았다. 주인은 이따금씩 나의 개체 중 몇 개를 용령이로 자르거나 괴롭혔다. 내 몸에서 통각이 영원히 사라졌으면.


DAY 365.


내가 의식을 갖게 된 지 1년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변
화가 있었으나 가장 큰 건 바로 나의 두 팔이 잘린 것일
테다. 주인은 나를 실것 부려먹다가, 나의 팔이 더이상 일을 감당하지 못하자 그냥 잘라버렸다. 너무 아파서 비명이 절로 나왔지만, 주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길폭한 친구가 위로의 눈길을 던졌다.


그 녀석, 그러니까 시블은 나와는 다른 종족이다. 사실 내가 하는 일을 정확히 말하면 그 녀석이 잘못한 것을 지워 주는 것이나, 그 녀석도 어차피 주인에게 조종 당하고 있기에 나는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 나를 거칠게 다루고 시블조차 괴롭히는 것은 바로 주인이기에, 나는 증오의 화살을 그에게로 돌려야 한다. 시블에 따르면 주인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자신의 머리를 잘근잘근 물어들는다며, 아주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게 우리의 운명인 것을.


DAY 500


나의 아들딸이 여전히 주인을 잘 섬기고 있다. 팔이 잘린 그 순간부터 나는 자식 혹은 복제동족들을 낳은 셈이 되었다. 우리 종목은 몸을 자름으로써 무성 생식을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다는 포상인지 주인이 나에게 자유
아닌 자유를 주었다. 주민의 영지 가장 구석에 않아 니
의 자식이 힘겹게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고문이다. 더이상 일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일하는 것을 의지에 상관없이 지켜볼 때면, 어릴 적의 예민한 통각이 되살아난 듯 무척이나 괴롭다. 녀석들의 고통에 절은 표정도 나의 젊었을 적을 회상하게 한다.


나의 자리 근처에는 주변의 빛을 반사하여 나의 모습을 비춰 볼 수 있는 몸을 가진 종족이 있는데, 나의 모습은 아주 가관이다. 젊음의 백안은 가신 지 오래요, 피부는누렇게 변했으며 검고 붙고 아무튼 다채롭게 물든 온몸이 폭삭 늙어 보였다.


오호동재라. 이것이 정녕 나의 운명이란 말인가?


DAY 550.


오랜만에 자식들을 만났다. 그동안 눈을 감고 현실에서 도피하려 했기에 자식들을 볼 수 없었다.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나의 젊었을 적보
다도 훨씬 더.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한 자식들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 그들을 처음 본 순간 나는 내 기억이
잘못된 줄 알았다.


오래전 팔이 잘린 위치에 그들을 갖다 울려 보았다.퍼
즐 조각처럼 딱딱 맞던 과거와 달리 그들은 힘없이 나
의 어깨 위에 없어져 굴러내렸다.


자식들이 나를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DAY 600.


기구한 나의 일생이여. 나는 오늘 더미로 끌려갔다.


자식들은 나를 만난 바로 다음날 더미로 불려갔다. 아
마 더미로 불려가기 전 마지막으로 나를 보게 한 건 아
닐까 싶다. 사형수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 가족들과 면
회를 하듯.


주인은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온몸을 끝까지 이용해먹었
다. 그러다 나의 몸이 너무 작아지고 초라해져 더이상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즈음, 그는 나를 더미로 처박았다.


어쩌면 좋은 건지도 모른다. 자식들을 따라 죽음의 길을 걸을 수 있으니. 나는 퀴퀴한 곰팡내와 지독한 쓰레
기 그리고 송장 냄새를 기어이 참아낼 자신이 있다.


DAY 601.


나는 오늘 화장당했다


DAY 602.


나는 지우개로서 파란만장한 삶의 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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