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띵-했지만 결국 없는 힘도 쥐어 짜내어 일어났다. 창문을 열어보니 햇살이 드리운 앞마당이 보였다. 나무에 있는 가지들은 다 부러지거나 얇아져 있었고, 눈이 새하얗게 곳곳을 덮어 놓았다. 눈길 위로 따뜻한 햇살이 비쳐 더 아름다웠다. '이게 올 겨울 마지막 눈이랬던가..' - 아직 서랍도 제대로 닫히지 않은 삐걱거리는 옷장을 뒤적거리며 대충 챙기고 밖으로 나간다. 으드득, 으드득거리는 눈을 밟는 소리. 왠지 모르게 찜찜했던 지난 날은 뒤로하고 앞길만 생각하며 무작정 걸어본다. - 그러다 어느 키 큰 청년이 베이지색 단추가 달린 긴 회색 코트를 입고 지나간다. 그의 모자 사이로 삐죽삐죽 나온 갈색 머리. 그리고 마스크와 눈동자 ... '어..?' - 문득 생각났다. 우리 학교에서 인기 많은 남자애랄까. '한준혁' '...!' - 2년 전 겨울, 우리는 사귀고 있었다. 나는 밤하늘이 예쁠 때면 그와 함께 옥상에 가곤 했다. 그곳에서 연락도 주고 받으며 우린 더 할 나위없이 행복했었다. 더군다나 그 빌라는 사람도 거의 살지 않는데다, 나랑 그만 아는 하나의 아지트 수준이었다. 그런데, 준혁이 고등학생이 되면서 점점 차가워졌고 나를 더 이상 신경쓰지 않는 것 같기에 나는 그를 멀리하게 되었다. - 그래도 나를 구해줬는데, 말을 걸기 위해 뒤돌아 보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ㅈ..쟤..가 나를 구해줬다는 증..거도 없고...' 이런 사이에 더 상처 주기도 싫고 받기도 싫었다.
그냥 우린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연인이었기를. 그냥 우린 계절 속에 피었던 작고 소중했던 꽃이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