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11 20:23•조회 82•댓글 3•구로
여름 오후는 이상할 만큼 달았다.
창문 너머로 햇빛이 느리게 번지고 있었다.
에어컨에서는 조금 오래된 것 같은 바람이 흘러나왔고, 카페 안에는 얼음이 잔에 부딪히는 소리와 낮은 음악 소리만 들렸다.
나는 창가에 앉아 복숭아티를 마셨다.
복숭아 향은 늘 조금 늦게 왔다.
처음에는 차갑고 밋밋한데, 삼키고 나면 입안 어딘가에 은근한 단맛이 남았다.
그래서였을까.
복숭아티를 마실 때면 가끔 네 생각이 났다.
처음에는 별것 아니었던 사람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마음 한구석에 오래 남는 것처럼.
우리가 처음 만난 날에도 너는 내 앞에 복숭아티를 내려놓았다.
― 이거 좋아하지?
나는 컵을 바라보다가 너를 봤다.
― 내가?
― 응. 왠지 그럴 것 같았어.
그때의 나는 네가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 같은 걸 제대로 말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싶었다.
그런데 너는 그런 걸 참 자주 맞혔다.
내가 피곤한 날이면 묻지도 않고 옆에 앉아 있었고, 내가 기분 좋은 날이면 나보다 더 크게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별것 아닌 일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별것 아닌 일들이 하나둘 쌓였다.
같이 걷다가 길을 잘못 들어도 웃었던 날.
내가 무심코 한 말을 며칠 뒤에 기억하고 있던 너.
집에 잘 들어갔냐고 묻던 늦은 밤의 문자.
헤어질 때마다 조금 아쉬운 얼굴로 웃던 너.
그런 순간들이 쌓여 어느 순간부터는 하루 중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사랑은 좀 더 특별한 모습으로 오는 줄 알았다.
어느 날 갑자기 심장이 뛰고, 세상이 달라 보이고,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선명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사랑은 별로 대단하지 않았다.
네가 내 컵에 남은 얼음을 휘저어 주던 순간.
집에 잘 들어갔냐는 짧은 문자.
헤어지기 싫다는 말을 대신하듯 조금 천천히 돌아서던 네 뒷모습.
나는 그런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르게 됐다.
그리고 그해 여름 끝자락에 우리는 헤어졌다.
왜 헤어졌는지는 이제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정말 기억나지 않는 건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함께 마신 복숭아티는 유난히 달았다.
그날은 그 단맛이 싫었다.
그래서 그 뒤로 한동안 복숭아티를 마시지 않았다.
시간은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게 흘렀다.
계절은 몇 번이나 바뀌었고, 네 이름을 떠올리는 날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러다 어느 늦은 오후였다.
우연히 그 카페 앞을 지나게 됐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잠깐 망설이다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익숙한 종소리가 들렸다.
나는 창가 쪽을 한 번 바라보고는 카운터로 갔다.
― 복숭아티 하나 주세요.
잠시 뒤, 잔이 내 앞에 놓였다.
나는 한 모금 마셨다.
여전히 달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괜찮았다.
나는 한동안 잔을 내려다봤다.
아마 사랑이 끝난다는 건 완전히 잊는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날의 기억이 없어지는 대신, 조금씩 멀어지는 것.
그래서 어느 날 문득 다시 마주쳐도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것.
나는 빈 잔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 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거 좋아하지?’
나는 피식 웃었다.
― 응. 이제는 좋아해.
물론 대답을 들을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은 한동안 내 곁에 남아 있었다.
따뜻한 복숭아 향처럼.
조금 늦게, 아주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