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운 M

설정
2026-09-28 20:41•조회 30•댓글 0•여우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엄마의 고향으로 이사를 왔다. 엄마의 고향은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이었다. 대도시에 살았던 나는 처음 느껴 보는 공기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도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생활하다 보니 기분은 좋아졌다. 그리고 6살에 다시 가게 된 유치원에서 널 만났다. 너는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고 한다. 부모님이 형의 장례식을 서울에서 하고 싶어 하셔 올라 왔던 것뿐이었다.

널 처음 보자마자 알아 보았다. 똘망똘망한 눈과 이마의 검은 잔털들. 나는 너와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어느새 우린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너도 그렇다고 생각했길 바란다.

하루는 유치원에서 운동회를 했었다. 4월인지 5월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초여름도 접어 들지 않았는데 너무 더워 땀을 훔쳤다. 넌 키가 또래보다 작았고 몸도 왜소했다. 너의 부모님을 처음 뵌 날 난 너의 똘망한 눈은 어머니를, 이마의 잔털은 아버지를 닮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화목한 너의 가족을 보고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시기라는 감정이 스쳤다.

여러 경기 종목을 끝낸 후 점심 도시락을 꺼내었다. 바쁜 엄마 대신 할머니가 운동회를 구경 온 터라 가족과 함께하는 경기에는 제대로 참여하지 못한 나와 달리 너는 가족의 품에 둘러 쌓여 한 눈에 봐도 정성이 들어간 도시락을 꺼내고 있었다. 할머니가 싼 도시락에는 각종 나물 반찬이 가득했다. 할머니의 노고도 모른 체 도시락을 거부했다. 고작 일곱 살이였던 난 할머니가 받을 상처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면 아이였기에 그게 당연했다.

그 뒤로도 너와는 잘 지냈다. 가끔씩 질투같은 감정들이 들 때를 제외하고는 죽이 잘 맞았고 늘 어울려 다녔다. 이제는 그런 일말의 감정도 남아 있지 않지만 가끔 옛날 생각이 난다. 아닌가. 어쩌면 아직도 난 너로 인해 질투를 느끼고 있나?


*


따뜻하게 데워진 죽을 후후 불어 조금씩 삼켰다. 오후의 햇살만이 들어 오는 고요한 집이 왠지 낯설었다. 이 시간대에 집에 있는 건 주말이나 휴일이 아니라면 극히 드무니까. 그마저도 방에 틀어 박혀 코튼을 치고 생활하기 때문에 이런 광경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머리가 띵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네게 메시지를 보낼까 고민했다. 천천히 휴대폰을 열어 네 이름을 찾았다. 아까 전 답장하지 못한 문장이 눈에 들어 왔다. 톡톡톡.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묘연했다. 아직 학교가 끝날 시간은 아닐 테니 기다리기로 했다. 메시지를 지워 냈다. 어느새 비워진 죽 그릇을 싱크대에 넣고 설거지를 했다. 손에 남은 물기를 닦고 방으로 들어 가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조퇴했어. 나 안 보고 싶냐?

너였다. 나는 조퇴라는 말에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디 아파? 갑자기 조퇴라니.”

—아니, 안 아파.

휴대폰 건너편의 네 목소리는 왠지 장난스러웠다. 아픈 건 아닌 것 같았다.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가장 먼저 들었다.

“안 아픈데 왜 조퇴를 해?”

—집에 간호해야 할 사람이 있다고 둘러댔지, 뭐.

“누구 아프셔?”

—너. 너 아프잖아.

“…….”

당황감과 약간의 기쁨이 뒤섞인 눈동자가 깜빡거렸다. 저 말은 즉 나를 생각했다는 것이다. 학교도 빼먹고 날 걱정할 만큼. 가슴이 답답한 듯 이상했다. 분명 기분은 나쁘지 않은데 구석에 박혀 곪고 있는 듯한 이 찜찜한 감은 뭘까. 네 목소리에 정신을 되찾았다.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집이지? 5분이면 가.

학교에서 우리 집까지는 차로 5분. 도보로는 30분 가량 걸린다. 그런데 5분이라고? 너의 부모님이 아셨다면 잔소리를 늘어 놓으셨을 테니 차를 타고 오는 것은 분명 아닐 거다. 택시 안도 버스 안도 아닌 것 같았다. 너는 걸어 오고 있다. 오로지 내가 아프기 때문에 학교에서 집까지 30분을 걸어 오는 중이었다. 가슴 한 켠이 두근거렸다.

널 처음 봤을 때는 그저 익숙함. 나와 비슷하다는 공통된 감정이 먼저 들었었다. 그게 점점 애정으로 변했다. 난 네가 좋았다. 적어도 중학생 때까지는.

사춘기가 오고 혈기가 왕성해져도 나는 누굴 좋아한다라는 감정을 가지지 않았다. 물론 부모님과 너는 정말 좋아했다. 그러나 그 감정이 연모나 사모같은 말랑한 것은 아니였다. 아니, 아니라고 생각했다. 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네가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연애를 하는 일을 본 적이 없었다. 너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전부 알면서도 몰랐다. 참 모순적이라고만 여겼다. 내가 다른 감정을 친구로서 좋아하고 있는 거라고 포장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널 보면 아들을 낳아 기른 듯한 느낌이 났다. 어떨 때는 듬직한 형 같았고 어떨 때는 한없이 어린 동생처럼 느껴졌다. 또 어떨 때는 둘도 없는 친구였고 어떨 때는 재수 없는 새끼였다. 어떨 땐 질투의 대상이였고 어떨 땐 죽도록 밉기도 했다. 이런 감정들이 하나하나 모여 사랑을 만들어 냈다. 아직 구분은 잘 가지 않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설렘을 준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어느새 전화는 끊어져 있었지만 네 생각에 입꼬리가 사르르 올라 갔다. 조금 더 이 감정을 누리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평생토록. 널 향한 내 마음이 더이상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진작에 눈치 챘어야 하는데. 가슴속에 묵혀 둔 찜찜한 감정이 이젠 뭔지 알 것만 같다. 내가 널 사랑하는구나. 그것도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아주아주 깊게.

6살에 내가 네게 느꼈던 감정은 사랑이었다. 사랑했기에 질투를 했고 사랑했기에 부러워했다. 너무 늦게 깨달아버린 걸지도 모른다. 혹은 너무 빨리 알아차려버린 걸 수도 있다. 6살에 처음 느낀 감정을 19살이 되어서야 제대로 마주했다. 나는 그동안 내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 보는 일을 꺼려하고 회피하며 살았다. 정면으로 부딪히지 못하고 자꾸만 빗겨 나갈 생각을 했다.

내 모든 날들에 내가 함께 했었다. 너는 내게 사랑이란 감정을 처음 알려 준 사람이자 그 사랑이 향하는 상대였다. 알아차렸으니 이제 고이 묻어 놓고만 살 수는 없었다. 엄마의 말이 맞았다. 바다는 강했다. 강하고 맑고 명랑했다. 주변의 모든 것을 끌어 당긴다. 나도 그 틈에 끌려 나에게 얽혀버렸다. 지독한 사랑앓이에, 가혹한 심해속으로 가라 앉았다. 깊게.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