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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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07 00:47조회 60댓글 1천진
胡蝶之夢
醉生夢死,
꿈이 깨어지다.











이천구 년 늦봄의 끝자락에 소녀가 죽었다. 장례는 치러지지 않더랬고, 그 남자는 종일 바다를 보며 울었다. 눈물의 짠 내와 바다의 소금내가 뒤섞여 매스꺼움을 풍겼다. 마을의 발걸음이 끊긴 그 바다에는 눈가가 헌 남자가 휩쓸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남자는 소녀의 이름을 몰랐다. 죽어가는 것에는 이름이 중요치 않다. 곧 죽을 것에는 이름이 중요치 않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고 그것을 보통 죽음이라 부른다.

소녀의 죽음 이 개월 뒤에 남자는 서울로 도망쳤다. 서울행 기차 안에서도 서럽게 울었다. 남자는 그때 처음으로 파도가 미웠다. 생채기 하나 없는 남자의 육체는 너덜너덜했고, 날이 갈수록 남자는 말라갔다. 완전히 서울로 도피한 후에도 그 마을 바다와 소녀를 망각할 수 없었다. 서울은 찬란했고 남자는 비틀렸다. 망가졌다. 남자는 다시 자신 안에 들어있는 모든 것을 흘려보내려 불 꺼진 작은 방 안에서 울기만 했지만, 그곳은 바다가 아니라 저 멀리 보낼 수 없었고 모든 슬픔을 옆에 둔 채로 날을 보내야 했다. 남자의 감정에는 이유가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기에 미워했다. 아름다워 보였기에 사랑했다. 아려왔기에 울었다.





소녀의 죽음

남자는 당시에 소녀가 죽은 것은 자신의 탓이라 생각했다. 죄책감이 있었다. 파도 위에서 만난 소녀와 나눈 대화, 자신이 뱉은 말. 소녀는 우주의 끝, 여름의 뒷면이 어디인 줄 알고 있었던 것인가? 남자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소녀의 죽음은 사고였다. 원래 시한부와 자살이 아닌 이상 죽음은 사고이다. 갑작스럽다는 말이 제격인 죽음이었다. 익사하는 건 아닌지 턱끝까지 숨이 차오를 정도로 더운 여름은 남자를 방심하게 만들었다. 등이 땀에 젖어 찝찝한 계절이 소녀를 압박했다. 붙어있는 피부가 땀인지 뭔지 모를 것들로 번들거렸다. 때마침 장마 탓에 비가 쏟아졌다. 공교롭게도 마을은 바다가 있었다. 울―렁울렁 넘―실넘실 범람했다. 비아냥대는 광활한 파도가 모래사장 위로 뛰어들었고, 별을 잃어가는 소녀가 모든 장마를 맞고 있었다. 비릿한 냄새가 진동했다. 남자는 그날 자신이 바다에 있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 상황을 수억 번 가정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과거의 일은 바꿀 수 없다. 남자는 처음에 부정했다. 그다음은 원망했다. 바다를, 파도를, 장마를, 여름을. 그리고서 자책했다. 서울은 넓고 눈물로 가득 채워 잠기기엔 견고했다. 남자는 그럼에도 울었다. 우울을 받아줄 것이 없었다. 휩쓸린 자리에 남은 것은 포말의 조각, 남자의 부산물뿐이었다. 수년의 삶에 고작 육 개월이 남자에게는 마냥 아팠다. 멍청한 남자는 소녀의 죽음이 사고라는 것을 몰랐다. 남자가 만든 죄책감이 남자를 짓눌렀다. 탓할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그의 죄였다.





우주의 끝

우주는 남자가 아무리 양팔을 벌려 끌어안으려 해도 그럴 수 없다. 허공을 헤집어도 잡히지 않고 캄캄한 우주가 눈앞에 가득 들어찬다. 버둥거리는 꼴이 마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으깨진 보잘것없는 존재와 다름없다. 몸소 느낀 우주의 광활함이 무기력할 정도로 거대하다. 별이 떠다닌다. 작고 빛을 뿜어대는 별들이 수놓인다. 이 별, 저 별 잡아보지만 뜨거워서 남자의 손이 타버린다. 문득 남자는 소녀가 보고 싶어진다. 별이 너무 많아 소녀를 찾을 수 없다. 남자의 사랑과 별이 뒤섞인다. 눈앞이 눈물로 흐려져― 남자는 다시 운다.

시간의 흐름을 가늠할 수 없다. 우주를 체류하다 몇 광년이 흘렀을까 아니면 이제 일 초가 지났을까. 소녀의 생각만이 남자를 이뤘다. 우주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남자의 옆에는 아무도 없다. 소름 끼치는 고요가 떠돈다. 혼자구나. 넓은 우주에 남자는 혼자다. 죽어감을 실감할 수 없다. 부유감이 남자 위로 쌓인다. 우주는 서울. 모든 것이 제자리, 남자는 붕 뜨기를 잘한다.

우주는 숨을 쉴 수 없는데 남자는 죽지 않는다. 남자는 손을 뻗어 말한다. 사―아랑. 손끝에 무언가 닿았다. 남자의 차가운 손에는 소녀의 허상이. 쥐어보았지만 손 틈 사이로 빠져나가더니 그것은 우주의 끝 너머 허무의 저편으로 가버렸다.





여름의 뒷면

찬란함에 가려진 여름의 뒷면을 끈적일 대로 끈적이고 널브러진 죽음이 굴러다니더랬다. 심장을 두 손으로 주무르고 열심히 씨피알을 해도 살아나질 않았다. 여름의 뒷면에 눌어붙은 소녀가 초점을 잃은 채 여름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저씨 나는 지금 여름의 뒷면이에요.

바닥에 혈액 같은 바닷물이 흥건했다. 텅 빈 목소리가 울렸다. 소녀는 눈을 감고서 평이하게 웃었다. 언제부턴가 파도의 포말이 소녀의 옷자락에 붙어있었다. 부서진 남자 사랑의 일부분이 소녀에게 따라붙었다. 익사할 것처럼 숨을 잘 쉴 수 없었다. 여름의 뒷면은 무진장 습하고 어둡기는 물론 질식하는 별의 고약한 냄새가 났다. 빛 하나 없는 여름의 뒷면은 죽지 않은 존재가 발견하기에는 심히 난해했다. 우주의 남자는 우주의 소녀를 찾아 헤맸다. 소녀가 있는 곳은 여름의 뒷면인데, 무지한 남자는 그것을 몰랐다. 여름의 뒷면에서 소녀는 끈적한 습기로 뒤덮여 갔다. 여름의 뒷면에서 걸음을 내딛다 잘못 빠진 곳은 우주의 끝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여름의 뒷면에서···. 소녀의 손이 끈적이는 바닥을 내리쳐 철퍽이는 소리가 났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남자는 소녀를 찾을 수 있을까? 죽은 별과 청춘이 쌓인다. 소녀는 겨우 고개를 내놓아 숨을 잇다가 곧이어 헐떡인다. 여름의 만조가 순환을 반복하다 여름의 뒷면에 도달하고 죽어가는 별들을 둥둥 띄운다. 여름의 뒷면, 끔찍하다.





남자의 죽음

일 년, 이 년이 지난대도 기대와 바람과는 다르게 남자는 죽지 않았다. 남자는 죽지 않았지만, 살아있다 말하기에는 뭐했다. 숨을 쉬었다. 눈을 깜빡였고 소리를 들었다. 침을 삼켰다. 갈라진 입술 사이로 소리라 칭하기 미안한 것이 튀어나왔다. 남자의 무의식에서 바다와 소녀, 우주가 번갈아 번쩍이곤 했다. 꿈에서 깬 남자는 속절없이 울기를 반복하고 심장을 쥐어뜯다 다시 지쳐 꿈을 꿨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까, 남자는 창밖 서울 하늘만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날은 보아하니 봄을 지나 여름이 도달하기 직전 첫여름이었다. 까만 하늘에 하얀 별이 밤바다에 윤슬을 보는 거 같았다. 바다가 있으면 소녀가 있었는데.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더운 바람이 부니 하늘이 미워졌다. 소녀가 없다. 하늘이 왜 바다를 닮아서는. 남자는 훌쩍 떠나고 싶어졌다. 바다가 너무 멀다. 이후로 남자는 매일 밤 밤하늘 윤슬을 보며 추억 속 소녀를 꺼냈다. 울음이 쌓였다.

투정을 부리고 싶고 어린아이가 되고 싶었다. 날카로운 별의 파편이 마른 남자의 손에 박혔다. 고통이 남자를 비틀어 꼬았다. 남자는 사색을 포기함과 동시에 살아감을 놓았지만 죽지 않았다.

···.

죽지 않았던가?
자, 우리가 애초에 죽음의 기준을 한정해야 했던 문제다.

남자는 며칠 뒤부터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머릿속에서 끝없이 메아리치는··· 죽고싶어죽고싶어죽고싶어죽고싶어죽고싶어죽고싶어죽고싶어죽고싶어죽고싶어죽고싶어죽고싶어! 남자는 소녀가 병적으로 보고 싶다. 서울은 아름답지 않아서 말이야





바다, 멸망

남자는 이천십사 년 여름, 다시 한번 바다로 도피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을 세우는 것까지 도달하기에는 셀 수 없는 울음과 설움과 괴로움이 있었다. 남자는 언제나 울기에 지쳐 잠들었지만, 서울을 미워하다 우주를 헤매고 까만 하늘 바다를 보며 소녀를 추억하다 마침내 깨달았다.

헐어버린 눈가가 이제 원래 남자의 얼굴이 됐다. 남자는 빛바랜 종이 위에 검은 펜 하나로 무언가 적어 갔다. 주로 소녀와 바다의 회상, 서울에 대한 욕지거리, 그의 썩어버린 바람. 종종은 소녀에게 편지를 썼다. 몇몇 페이지는 눈물 자국이 남자의 날카롭고 힘없는 필체를 일그러뜨려 알아볼 수 없었다. 남자는 왜, 이렇게도 소녀에게 집착적인가를 물으면 그는 완만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소녀가 부서지고 죽어감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찬란했던 탓에. 남자가 소녀와 만났던 그날 쓸데없이 모든 게 예뻤다.

계절이 끝없이 바뀌었다. 밤하늘 윤슬의 별자리가 돌고 돌아 봄을 일렀다. 남자는 히아신스 꽃다발 하나를 챙겨 불어오는 봄바람과 바다로 떠났다. 흔들리는 남자의 눈동자에는 소녀와 그 바다 파도와 마을의 여름만이 가득했다. 죽어갔나― 에 물음표가 붙어 거의 죽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여름이 있었다. 기차가 덜컹였다. 남자는 눈을 감았다. 꿈을 꾸었다, 소녀의 꿈을. 남자의 뺨으로 미지근한 눈물이 흘렀다.

남자는 역에서부터 그가 사랑했던 바다가 나올 때까지 미친 듯이 달렸다. 도중에 차려입은 옷가지와 넥타이 따위가 흐트러지고 구두가 벗겨져 넘어졌다. 눈물이 남자의 턱선을 따라 내려가다 아스팔트 위로 한 방울 떨어졌다. 꽃다발이 위태로이 흔들렸다. 숨이 차서 숨이 막혔다. 한껏 벌어진 입 사이로 숨이 바삐 드나들었다. 게걸스러운 소리가 났다. 남자는 자신 안에 들어있던 모든 숨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치열하게 내달렸다. 딱딱한 아스팔트에 구두 소리가 요란스레 울리기도 잠시, 남자의 핏기 없는 맨발에서 혈액이 묻어나왔다. 아픔을 망각한 지는 오래되었다.

모래가 밟혔다.

이제서야.

남자는 주저앉았다. 손바닥에는 모래가 들러붙었고 히아신스 한 송이가 내팽개쳐졌다. 목이 메갔다. 모든 것이 남자를 울게 놔뒀다. 남자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땀과 눈물과 타액이 함께 떨어졌다. 바래가는 기억 속에서 되감던 파도가 눈앞에 있다. 서울 하늘을 보며 회상하던 바다는 남자의 눈앞에서 일렁인다. 남자의 일부가 담긴 바다 정경이 이때까지 그 바다를 대체하던 것들이 초라해질 정도로 수려했다.

남자는 맨발로 모래사장을 디디며 기어이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을 쥐었다. 손 틈 사이로 흘러나와 남은 것은 축축함과 모래 알갱이. 해변에 떨어진 아직 시들지 않은 히아신스 꽃다발이 바람에 날리지도 않고 꺾어갈 수도 없게 적당히 역한 악취를 풍기더랬다.

남자는 파도 위로 몸져누웠다. 눈물이 포말에 휩쓸려 바다가 되거든 소녀는 이를 알 수 없겠지? 만조의 여름 바다가 순환을 거듭하려면 몇 광년이 지나야 할지 답을 아는 존재가 없다. 남자의 죽음을 구태여 막을 소녀가 없고 어떤 구경거리도 되지 않는다. 남자를 글로 써 내려간다면 그가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대도 한참이나 따분한 독백일 것이다.

별이 멸망한다. 바다 위 수놓인 별 하나 꺼져가는 것이 남자의 눈물에 걸쳐진다. 봄바람이 분다. 더운 바람, 지쳐 잠들어 날을 보낸다면 다음 아침은 아마 첫여름일 테다. 남자는 울기를 그만둔다. 억지스럽고도 우스꽝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눈물 자국이 남아 있는 붉은 뺨이 부풀고 끌어올린 입꼬리가 떨린다. 남자의 옷가지 사이로 시린 파도가 들어오고 남자는 소녀에게 건넬 첫 마디를 구상한다. 남자는 몽상을 빠져나온다. 울음 젖은 목소리가 웃음을 소리 내뱉는다.

소녀, 만나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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