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거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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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0 14:56조회 50댓글 1세리아
잠에서 깬 뒤의 무의식이 좋다. 그 무엇도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그 무의식이 좋다. 윤혜는 눈을 뜨면 맞이해야 할 현실이 두려워 언제까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이렇게 평생동안 눈을 감고 있으면 아무래도 빛의 두려움과는 마주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감각들이 몸 전체를 일깨운다.

죽은 사람들의 혼이 서린 칙칙한 이 냄새는 분명 병원의 향기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일인실은 아닌 듯했다. 사람과 마주쳐 입을 열긴 죽도록 싫으니 눈을 더 세게 감는다. 평생토록 뜨지 못하도록.

또 죽지 못했구나.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미세한 안도감과 그보다 훨씬 큰 두려움이 몸을 옥죄는 듯하여 윤혜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심장과 다리에서 아찔한 격통이 느껴졌다. 이번엔 칠 층이었다.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졌는데도 죽지 않았다니. 나는 신의 가호나 저주, 적어도 그 둘 중 하나는 받고 사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아무래도 저주에 더 가까운 것 같지.

윤혜는 병원을 정말이지 싫어했다. 그 감정은 파멸과도 같았다. 병원에는 ‘진짜 아픈 사람들’이 있다. 보이지도 않는 아픔에 괴로워하는 가짜 아픔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보이고 느껴지는 아픔에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보다보면 문득 토악질이 밀려온다. 자신에 대한 불확실함과 혐오가 파도처럼 그녀를 덮친다. 저렇게 아픈데도 삶을 이어나가려는 사람들을 두고, 나는 무엇을 이리 힘들어하는가. 보이지도 않은 것을 힘들어하며 보이지도 않은 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정말 ‘아프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인가.

윤혜는 항상 자기를 제정신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다른 사람들은 타인들과에 관계에서도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무언가를 도전하는 데도 망설이지 않고 두려움과 고통에서도 움츠리지 않는다. 그들은 가뜩이나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쨍하다는 이유로 울고 싶을 정도로 힘들어하지 않았다.

“……자는 척은 그만 하렴.”

그 소리에 눈을 떴다. 예상했던 대로 흰 천장이다. 손목에는 링거들이 꽃혀 있고 삐, 삐 하는 죽음의 소리가 정적을 가득 채웠다.

윤혜는 다시 죽고 싶어졌다. 그 정적과 정막에 차마 하지 못했던 무수한 말들이 담겨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주변이 시끄러웠지만 이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름 섞인 손이 윤혜의 가냘픈 손을 붙잡는다. 어머니가 저리 될 때까지 걱정만 시키다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또 죽을 결심을 하고 또 죽지 못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 미숙한 행동의 결과는 도로 부모님께 돌아갔다. 눈물을 흘리는 부모님의 모습을 볼 때마다 모든 것이 부끄러워진다. 이런 자신의 모든 것이 부끄럽고 부모님에게 죄송스런 마음이 든다. 그녀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그에 따른 괴로움에 그녀는 또다시 뛰어내리고 싶어졌다.

윤혜는 왜 이런 괴기한 짓을 다섯 번도 넘게 시도했는가?

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칠 층에서 떨어져도, 이 강으로 빠져도, 이렇게 피를 많이 흘려도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도대체 왜.

죽으려 했던 윤혜는 모순적이게도 죽음을 두려워했다. 이런 짓으로 죽으면 나는 이 고통에서 벗어나겠지만 내 모든 것을 잃고 나의 존재 자체가 사라지게 되는 것과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미래를 완전히 잃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은 생존에서 오는 고통만큼 컸다. 그 두 감정들은 지나치게 무거워 윤혜를 좀먹었으니, 이제는 어떤 방법으로라도 그 감정들을 해결할 때가 되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 두 감정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완전히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윤혜는 그 방법을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러다 어느 날, 아파트 삼 층 높이에서 콘크리트 바닥을 바라보다, 여기에서 떨어지면 죽진 않겠지만 엄청나게 고통스럽겠구나 싶더라. 그때 깨달은 것이, 아,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자살 시도라면 죽음의 두려움 없이 도전할 수 있겠구나!

그래서 어느 순간에도 ‘생존’의 가능성을 남겨두려 했다. 죽지 않을 확률이 남아있으니 뛰어내리기 두렵지 않았다. 항상 어중간한 높이에서, 일부러 경찰서 근처의 강에 투신했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사실 윤혜는 슬슬 사는 것의 두려움이 죽는 것의 두려움을 이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런 스스로의 감정이 지독히도 무서워서, 이토록 부정적인 생각에만 머물러 있는 나에게 너무나도 무서워서 그녀는 악착토록 살았다.

남들같이 살고 싶었다. 그게 힘들었다. 태생적인 문제인지 후천적인 문제인지, 애정결핍과 자기혐오, 피해망상 때문에 그 어떤 생각도 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생각을 멈추기란 불가능했다.

윤혜는 선천적으로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다.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고 그 생각 속에는 그녀의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존재했다. 조금의 기대에도 수많은 망상에 시달렸다. 그러던 어느 순간, 윤혜는 자신이 ‘생각’이란 것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그 사실에 매우 놀랐다. 항상 피해망상과 상상에 시달리던 그녀가 갑자기 생각을 멈췄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그녀는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뇌했고, 눈 깜빡한 어느 순간 집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근본적으로 생각을 그만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생각한 모든 것을 잊고 있었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망상에 시달린 뒤 어느새 저 멀리 나와버린 그녀는, 또다시 이런 말을 되뇌인다.

아,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퍼뜩 정신을 차린 윤혜의 눈에서 파랗게 광채가 돌았다. 모든 것을 인정하기 시작한 그 순간 밀려오는 온갖 부정적인 감각들을 온전히 느끼며 그녀는 무의식 속으로 고꾸라졌다.

윤혜가 되돌아 누웠다. 마른 눈에서 매마른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물기 하나 없는 입으로 죽고 싶다, 를 소리 없이 되뇌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을 때까지. 그녀 자신조차도 그녀를 잃을 때까지 끝없이 자아 소멸을 되뇌었다. 자신을 그저 ‘모든 것을 힘들어하는 정신병자’로만 보게 되었을 때 그녀는 비로소 잠에 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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