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보이지 않는 여름
||| 밤이 오길
어제와 같은 교실, 같은 책상, 같은 문제지만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칠판 가득 적힌 하얀 수학 기호들 위로 자꾸만 엉뚱한 잔상이 겹쳐 보였다. 붉은 벽돌의 거친 질감, 가로등 불빛에 일렁이던 그 아이의 실루엣, 그리고 내 이름 석 자를 부르던 그 맑고 투명한 목소리.
"이서준, 집중 안 하냐?"
옆자리 짝꿍이 툭 치는 소리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평소라면 한 문제라도 더 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을 점심시간이었다.
하지만 내 샤프 끝은 문제집 귀퉁이에 의미 없는 낙서만 그리고 있었다.
정여름.
이름을 가만히 읊조려 보았다.
입술 끝에 닿는 발음이 꼭 시원한 소다 맛 사탕처럼 달콤했다.
여름이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집에서 공부한다고 했으니, 아마 나처럼 책상 앞에 앉아 있겠지.
햇빛이 잘 안 들어서 밤이 더 선명하다던 그 이상한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여름아, 너는 너랑 닮은 계절 속에서 어떤 풍경을 보고 있니?'
|| The fleeting nature of a warm summer evening often serves as a poignant metaphor in literature, reminding readers that even the most vibrant periods of human existence are inherently ephemeral.
영어 지문을 읽다가도 'Summer'라는 단어만 나오면 시선이 머물렀다.
창밖의 매미 소리가 아까보다 훨씬 시끄럽게 들려왔지만, 어제 담장 너머에서 들었던 그 정적에 비하면 소음 축에도 못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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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체육 시간,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는 모습을 창가에서 멍하니 바라봤다.
햇살이 따갑게 쏟아지는 운동장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여름이는 왜 학교에 다니지 않는 걸까.
집에서 혼자 공부하면 외롭지는 않을까.
아니, 어쩌면 그 담벼락 안쪽이 여름이에겐 세상의 전부인 걸까.
생각의 꼬리는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질문은 자꾸만 늘어갔지만 답을 해줄 사람은 없었다.
오직 다시 그 골목으로 달려가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야, 이서준. 너 오늘 좀... 멍해 보인다. 무슨 안 좋은 일 있냐?"
"어? 아니... 그냥."
나는 서둘러 문제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하얀 종이 위엔 검은 글자 대신, 달빛을 받아 반짝이던 여름이의 목소리만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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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문을 나서자마자 습한 열기가 훅 끼쳐 왔다.
원래대로라면 노란색 학원 버스에 몸을 싣고 다시 좁은 칸막이 책상 앞에 앉아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 19년 인생 동안 단 한 번도 어겨본 적 없는 그 견고한 궤도를 이탈하기로 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보고 오자.'
얼굴도 보지 못한 애한테 대체 무슨 마음이 생겼다고 이러는 걸까.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발걸음은 이미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학원 버스가 떠나는 뒷모습을 뒤로한 채, 나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터질 듯 뛰는 게 단순히 달리기 때문인지, 아니면 생전 처음 해보는 일탈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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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에 들어서자 밤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밤에는 신비로운 안식처 같던 붉은 벽돌이
친절하게 한곳 한곳 쏟아지는 햇살 아래에선 그저 낡고 바스러진 고물처럼 보였다.
가로등은 빛을 내뱉지 못한 채 우뚝 서 있기만 했고, 담장 위 노란 꽃들은 타들어 가는 햇볕 아래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드디어 어제 내가 앉았던 그 자리에 도착했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담벼락 앞에 섰다. 밤에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엔 굳게 닫힌 낡은 대문과,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적막한 공기만이 가득했다.
"...여름아?"
아주 작게 이름을 불러보았다. 혹시라도 창문을 열고 "어? 서준아, 정말 왔구나!" 하며 고개를 내밀어 주지 않을까 하는 어린아이 같은 기대를 품고서.
하지만 야속하게도 담장 너머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바람이 불어와 마른 잎사귀를 굴리는 소리만 요란할 뿐, 어제 나를 구원했던 그 투명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낮의 담벼락은 밤보다 훨씬 높고 견고해 보였다.
햇빛이 잘 안 들어서 밤이 더 선명하다던 여름이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혔다.
여름이 말대로였다. 눈부시게 밝은 이 낮의 풍경 속에서, 나는 오히려 여름이에게 한 발자국도 다가갈 수 없었다.
나는 한참 동안 텅 빈 담벼락만 바라보다 결국 가방끈을 고쳐 멨다.
보이지 않는 여름.
이 찬란한 햇살 아래서 그녀는 철저히 숨어 있었고, 나는 아직 그녀의 세상에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일 뿐이었다.
"....밤에 다시 올게."
나는 아무도 듣지 못할 약속을 남긴 채, 다시 지루한 현실의 길로 발을 돌렸다.
해는 아직도 하늘 높이 걸려 있었고, 밤이 오기까지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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