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19 15:18•조회 82•댓글 3•처연
—여기다. 멈춰.
록이 령의 앞으로 손을 뻗으며 명령조로 말했다. 령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들이 멈춰 선 곳은 행성이었다. 아주아주 작아서 주변이 한 번에 보이는 소행성. 록이 천천히 한 발짝을 내딛는다. 행성의 표면은 회빛의 흙먼지들로 뒤덮여 있었다. 발을 딛을 때마다 매캐한 연기가 피어 올랐다. 령은 오른손을 휘휘 저어 연기들을 날려 보냈다.
—이런 행성은 처음 봐.
—그야 궤도에 잡히지 않았으니까.
록은 령을 돌아 보았다. 록의 손에 들린 나이프가 번뜩거렸다. 령은 담담했다. 놀라지 않았고 그저 그의 갈 길을 걸었다. 령은 고아였다. 사실 이곳을 떠도는 거의 모든 령 또래의 여자는 고아이다. 록은 령과 오랜 시간 붙어 다닌 동료이다. 록 역시 고아 출신. 둘은 스물을 넘겼지만 고아라는 꼬리표는 사라지지 않았다.
둘은 행성을 살폈다. 사람은 살지 않는 듯했다. 하긴, 이런 행성에 누가 살고 싶어 하겠는가. 작고 볼품 없는 행성은 딱히 볼 것도 없었다. 중얼중얼중얼••• 록이 행성의 표면을 관찰하는 동안 령은 무언가를 열심히 중얼거렸다. 중얼중얼중얼••• 록이 주변을 살피는 동안에도 령은 중얼거렸다.
—그 짓 좀 그만 둘 수 없어?
록의 성난 목소리가 텅 빈 행성에 울렸다. 령은 놀라긴커녕 아무 말이 없었다. 둘은 저벅저벅 행성을 돌아 보았다. 며칠만에 다 돌 수도 있을 것 같은 크기였다. 천천히 걷던 와중에 록은 무엇과 부딪혔다. 이맛살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을 때 눈 앞엔 커다란 기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기둥은 투명해서 모든 게 드러났다. 그런데 아주아주 굵고 길었다. 사람 다섯은 있어야 겨우 안을 수 있을 정도의 굵기와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이를 자랑했다. 록은 머뭇거리다가 령을 돌아 보았다. 령은 행성 주위 우주를 관찰하는 중이었다. 록이 큰 소리로 령을 불렀다. 둘은 기둥을 바라 보고 섰다.
—이건 뭐지?
—모르겠어. 그런데 크기가 어마어마 해.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봐. 한쪽은 별이 보이는데 한쪽은 아예 깜깜하잖아.
령의 말에 록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정말이었다. 별이 쏟아질 듯 가득 찬 곳이 있는가 하면 온통 깜깜한 반대편이 존재했다. 둘은 계속 그것을 살폈다. 기묘한 분위기에 몸이 움츠러 들었다. 록은 멍하니 행성을 바라 보았다.
—우리, 도망가자.
령의 목소리가 록의 귓바퀴에 머물렀다. 도망가자고? 이 행성으로부터? 어떻게?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저길 봐. 시간이 없어. 비행선을 타기도 전에 죽고 말 거야. 받아 들여야 해. 우린 이미 죽은 목숨이야. 록이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가 스쳤다. 령의 목소리가 또다시 귀를 파고 들었다.
—우린 목적지를 잘못 설정했어. 여긴 우리가 원한 행성이 아니잖아. 저 기둥. 무언가 이상하지 않아?
록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저 침묵을 택했을 뿐. 저건, 저건 죽음이다. 우리의 죽음이다. 여길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죽음은 빨라. 빠르고 순간적으로 사람을 덮치지. 아, 우린 죽는다. 어쩔 수 없이, 아니 잘못된 선택으로. 굉음이 울렸다. 땅이 흔들리고 행성이 빛났다. 기둥이 광활했다. 황홀한 기분과 맞부딪혔다. 우린 먹힌다. 굶주린 죽음에게.
너털웃음을 흘려 보냈다. 록은 령을 껴안았다.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령도 록을 안았다. 둘은 서로를 안고 행성에 잠식되었다. 행성이 아니였다. 그것은, 추악하고 독립적인 생명체의 일부분이었다. 그 생명체는 일부분으로 사냥을 한다. 록은 령을 향해 되감았다. 행성은 사라졌고 록과 령 또한 그랬다. 둘은 함께 멸망했다. 록과 령은 두 번 다신 보이지 않는다.
+(덧)
흐름이 매끄럽지 않은 것 같아 다음에 이런 소재 다시 도전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