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붙잡아 꺼내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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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9 22:12조회 130댓글 8한고요
스물여섯의 여름, 낡은 상자 속에서 캠코더 하나를 꺼냈다. 검은 비닐 테이프에 새겨진 우리의 시간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전원을 켜자 화면에 잡음이 일더니, 이내 어색한 미소와 덜 자란 얼굴들이 드러났다. 그것은 열여섯 살의 우리였다.

화면 속 너는 근육이라곤 없는 팔을 과장스럽게 흔들며 랩 가사를 흉내 내고 있었다. 볼품없는 근육을 자랑한다며 웃통을 벗어젖히던 모습, 옆에서 숨 넘어가듯 웃던 내 모습이 이어졌다. 부끄럽고 어리숙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존재인 듯 확신에 차 있었다.

캠코더는 우리를 호수까지 데려갔다. 한여름의 밤, 맨발로 뛰어들던 너의 뒷모습. 물보라가 터지고, 차가운 물결이 별빛을 부서뜨렸다. 너는 소리쳤다.

“야, 우리 진짜 대박이지 않냐!”

화면 밖의 내가, 환하게 웃으며 카메라를 흔드는 모습이 겹쳐졌다. 웃음소리는 지금의 고요한 방을 메우며 되살아났다.

나는 무심코 휴대폰을 들었다. 번호부를 뒤적였으나 네 이름은 사라져 있었다. 희미하게 떠오른 기억을 더듬어 아무 번호나 눌러보았다. 이내 기계적인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현재 사용하지 않는 번호입니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 여름의 행복과 웃음, 모든 서툼과 무모함은 그 시절의 공기와 빛 속에서만 유효했다는 것을. 몇몇 기억은 다시 붙잡아 꺼내기엔 너무 찬란하고, 너무 여렸다. 내가 지금 손을 뻗는 순간 오히려 빛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영상은 마지막으로 우리를 보여주었다. 어깨를 맞대고 서서, 미래에 대해 떠들어대던 두 소년. 그 누구도 아직은 어른이 되지 않았던 시간. 나는 리모컨을 내려놓고, 조용히 전원을 껐다.

창밖으로 여름의 바람이 스쳤다. 문득 생각한다. 너 역시 어딘가에서, 나와는 다른 일상 속을 살아가고 있겠지. 하지만 아주 가끔은, 정말 가끔은, 너 또한 이 순간을 떠올려주면 좋겠다. 호수의 물결, 편의점 불빛, 그리고 너와 나의 웃음.

그 모든 것이 우리 청춘의 증거였음을.
그 시절은, 다시는 닿을 수 없는 우리의 찬란한 날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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