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오늘따라 유독 습기가 짙은 공기에 연은 불쾌감을 짓누르려 입술을 깨물었다. 제아무리 여름이 길어졌다지만 아직 유월이라는 생각으로 괜히 걸친 칠보 티셔츠가 원망스러웠다.
높은 습도와 주룩주룩 쏟아져 기분을 다운시키는 빗방울만 해도 이미 오늘의 불쾌감 한도를 한참 넘기기에 충분했다. 연은 습관적으로 내뱉으려던 한숨을 간신히 다시 삼켰다.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네가 ‘끝‘이라는 말도 꺼낼 수 있는 사람인진 몰랐는데…”
미세하게나마 떨리는 어투였다만 그 어투에 슬픔이나 분노 같은 밋밋하고 일차원적인 감정만 섞여 있는 건 아니었다. 이를테면 체념이라던가, 망상에 가까운 희망이라던가, 희미한 죄책감이라던가… 젠장, 아무튼 시궁창 같은 감정뿐인 건 비슷하니 이런 얘긴 그만두자.
“끝내야지. 언제까지고 서로 맞추려고 애쓰면서 살아갈 수는 없잖아. 계속 버텨 봤자 서로를 찌르는 거 말곤 할 게 더 없다고.”
담이 타협할 생각 따윈 전혀 없다는 듯 강한 어투로 단정지었다. 최대한 언성을 높이지 말자고 다짐한 채 집에 발을 들인 연이었지만 사람의 타고난 성질은 한낱 가짐으로 손쉽게 눌러지는 게 아니었다. 이 말은 즉 빌어먹게도 연이가 또 연이했다는 뜻이다.
“찌른다고? 그건 네가 먼저였잖아! 내 말은 듣는 척도 안 하고 네 마음대로 행동한 게 누군데!”
“네가 나를 그렇게 느꼈다면 더더욱 헤어져야지. 네 마음에는 들지 않았을지 몰라도 나는 최선을 다해 너를 배려해서 행동했어. 내 최선이 네 입맛에 맞지 않았다면 결국 우리가 좋은 인연이 아니란 뜻이겠지. 이젠 더 이상 숨 쉴 공간조차 없잖아.”
나름대로 논리정연했지만 제대로 성질이 돋친 연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사실 성질이 돋우지 않았더래도 연에게는 별달리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극단적이고 다혈질적이었던 그녀와 차분하고 사실을 요하는 그는 뿌리부터 달랐으니까. 연이 신경질적인 어투로 담에게 쏘아붙였다.
“숨 쉴 공간? 그런 건 나한테도 없었어! 네 일을 나보다 사랑하게 된 그때부터 숨 쉴 공간 같은 건 알아서 포기해야 정상 아니야?”
“여기서 갑자기 왜 일 얘기가 나와?”
“지금 넌 너랑 나의 인연을 완전히 끊겠다는 선언을 한 거 아니었어? 인연 끊기 전에 섭섭했던 것쯤은 다 털어놓고 끊어야 속이라도 시원하지!”
어느새 연의 눈꺼풀에 눈물 방울이 맺혔다.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연이가 칠보 티셔츠로 눈가를 거칠게 훔쳤다. 그래도 칠보 티셔츠를 입고 온 게 완전히 나쁜 선택은 아니었나. 마지막은 예쁘게 끝내고 싶다는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칠했던 마스카라가 옷자락에 형편없이 번졌다.
“잠깐, 연아. 잠깐만 진정해 봐, 일단은-”
“일단은 개뿔, 우리가 몇 년을 사귀었는데! 최소한 무턱대고 문자로 통보하지 말고 만나서 천천히 말을 꺼냈어야지! 누군 헤어지는 선택지를 생각 안 한 줄 알아, 너만이 헤어진다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마냥 건방지게 굴지 말라고!”
연이가 가래가 끼어 갈라진 목소리로 앙칼지게 소리를 질러댔다. 담은 묵묵히 그 질타를 받아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처럼 네가 발작할 게 뻔하잖아.”
“뭐라고, 발작?” 연이 눈을 부릅떴다. “헤어지자고 문자까지 보내놓고 막상 오늘 만나니까 약속을 미루려고 안달 났던 게 누군데!”
“그럼!” 기어이 담의 언성도 높아졌다. “넌 어떻게 헤어지기 싫다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헤어질지 말지 의논하는 날을 2000일 기념일에 잡을 수 있어?”
연의 울음 섞인 고함이 잠깐 멎었다. 아까와는 상당히 달라 보이는 이유로 부릅떠진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담은 그런 연의 눈동자를 잠깐 말없이 응시하다가, ‘그’ 담답게 금방 정신을 차린 듯 몸에 힘을 풀었다.
“…미안.”
담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낮았고 어쩌면 감정이 다 메말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덤덤했다. 하지만 역시나 언제나 그랬듯 연의 울음 섞인 숨결을 뚫고도 또렷하게 전해질 만큼 힘이 있었다. 헤어짐의 유무로 시작된 연인들의 격정적인 감정 싸움에 나오기에는 그닥, 사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다시금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여왔고, 방 안의 공기는 무겁게 정지했다. 연의 감정이 가라앉은 것처럼 보이자 담이 다시 말을 꺼냈다.
“미안하지만 이것도 우리가 헤어져야 할 이유 중에 하나야. 서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순서부터가 다르잖아. 이런데 우리가 어떻게 계속 편하게 지낼 수 있겠어.”
“하지만 지금까진…”
“예전의 우리는 그런 문제점들은 사소하게 여길 수 있을 만큼 서로가 서로의 전부였으니까.”
담의 어투는 단호했다. ‘서로가 서로의 전부’라는 상당히 감성적인 로맨스 소설에나 나올 법한 말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연은 또다시 ‘그럼 이제 너는 내가 네 전부가 아닌 거야’라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정말 사랑했었는데…”
연이 작게 중얼거렸다. 렌즈를 끼고 오지 않은 게 다행이었을까, 연은 눈이 새빨갛게 붓도록 문질러댔다. 딱히 담에게 들으라는 의도로 내뱉은 말로는 보이지 않았다만 그렇게 가까이서 서로의 숨결 하나하나까지에도 집중하던 사람끼리 그 혼잣말이 들리지 않았을 리 없었다.
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저 눈물을 흘리고 마스카라가 번진 것뿐이었는데 연의 몰골은 처량해 보였다. 담이 입술을 짓씹었다. 도대체 둘이 만난 그 몇 년 동안 그 둘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어떤 이유로 서로를 그렇게 열렬하게 사랑했을까?
- 놀라운 사실! 둘 중에 상대를 더 사랑한 건 누가 뭐래도 담이었단다.
“하아…”
연이 습관성일지도 모를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단정적인 비관을 싫어했던 담에게 연의 한숨은 늘 달갑지 않은 손님이었지만 그보다 더 달갑지 않은 건 한숨을 지적한 뒤의 연의 태도였다.
“한숨, 쉬지 마.”
담의 무의식이 다짜고짜 말을 내뱉었다. 담은 연의 무작정 비관하는 태도도 싫어했지만, 정말 극한 상황에 치닫았을 때 연의 반쯤 체념한 물기 어린 한숨을 더더욱 싫어했다. 연이 그런 한숨을 쉬는 게 좋지 않았고, 편치 않았다. 자신이 대신 상황을 겪고 싶을 만큼 싫었다.
- 담은 바보다. 한 번도 바보가 아닌 적이 없었다.
“…담아.”
의외로 담의 명령조를 띈 부탁에 연이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다. 연은 되레 마치 담과 같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 목소리를 원래 자유자재로 부리는 사람의 이름을 연호했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멎지 않았다. 연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듯 입술을 깨물고 번진 마스카라 자국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냥, 끝내자.”
연의 새카만 눈동자가 무감각하게 자신의 전 연인을 응시했다. 연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더 이상 미련 없는 결심이 담겨 있었다. 담은 자신에게 닥치리라 예상한 시원한 감정 대신 든 미묘한 감각에 의문을 품었다.
- 역시나 바보.
“어차피 네가 헤어지자고 말을 꺼냈으니 마음이 식었다는 거겠지? 이래 봤자 외사랑이랑 다를 게 뭐야. …응, 우린 여기까지가 맞나 보네.”
연이 중얼거리더니 비틀거리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마치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그 동작에 담이 반사적으로 선을 올렸지만 연이 내밀었다.
- 바보.
“고마웠어.”
냉담하고 단호했다.
연은 그대로 시선을 바닥과 마주한 채, 마치 담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흉물 취급하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다가오지 말라는 제 뜻을 온몸으로 내뱉으며 연이 천천히 자리에서 상체를 땠다. 어떻게든 비척비척 걸어 현관에 도달한 연은 신발을 구겨 신었다.
- 하필이면 그 신발도 담과 함께 골랐던 신발이네.
“잘 있어.”
다음 만남을 기약하지 않는, 제 없이도 잘 살라는 그런. 연의 성격에 그 말에다 미련을 담은 은유를 집어넣었을 리 없었다. 뒤돌아보지 않은 채 마치 흘리듯 내뱉어낸 말은 지나치게 차가웠지만 어쩌면 그랬기에 되려 담에게 어울렸다. 담은 언제나 차가웠으니까. 그의 집에서 연과 담이 함께 잠들었을 때조차 흔하고 담담한 잘 자, 그뿐이었다.
담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띠리링, 하는 기계적인 멜로디가 이미 도어락이 잠겼음을 일러주었다. 담은 꼼짝도 못 한 채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연과 닫힌 문, 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가. 이 순간까지도 담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고작 그것이었다.
- 그 ‘담’이 아직까지 현실 파악을 못 했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겠네.
똑딱거리는, 도어락 소리만큼이나 기계적이고 밋밋한 소리가 텅 빈 거실을 조용하게 울렸다. 어쩌면 담에게 가장 어울리는 소리. 하지만 연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 그랬기에 둘의 결말은 결국 언해피 엔딩이었다.
- 하지만 담은 시계 초침 소리를 싫어했어.
시곗바늘이 깔짝이는 소리와 더불어 여전히 그치지 않았던 비가 잔인하게도 맑은 창문 위로 흘러내렸다. 비는 아직도 멎지 않았다.
- 싫다고 해도 시작된 건 계속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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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시간을 이런 누추한 소설에 써주셔서 매우 감사티비함니다♡
뜻있는 소설 아니고 자컾들이 싸우는게 좋아서 쓴글!
아직많이부족하니너무만은팩트폭력은상처가될지두 (;_;)
https://curious.quizby.me/este… << 큐리는여깃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