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제주도의 작은 마을. 백은지는 바다와 돌담으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녀는 제주도 사람들처럼 느긋하고 순박하게 살았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삶에 어느 날, 김은철이라는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부산에서 온, 고향을 떠난 사람이었다.
김은철은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 제주로 이사 온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병을 앓고 있었고, 어머니는 간신히 집안을 지탱하고 있었다. 은철은 그런 부모님을 대신해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래서 부산의 떠들썩한 거리를 떠나 제주로 내려왔다. 제주도는 그에게 낯설고, 고요한 바람 속에서 마음이 답답했다.
그가 처음 백은지를 만난 것은 마을 회관 앞이었다. 은철은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몇 번 나갔지만, 처음엔 모두 낯설기만 했다. 백은지는 그렇게 그가 다가오는 길목에 서 있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은철에게 말을 걸었다.
"은철 씨, 여기 제주도에 와서 힘든 거 없나요?"
은철은 잠시 당황했지만, 그녀의 눈빛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뭐... 처음엔 좀 낯설어서. 부산은 항상 북적이고, 사람들이 많았는데, 여기 제주도는 너무 고요해서 그런지 적응이 쉽지 않네."
백은지는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제주도는 자욱하고, 느긋한 게 특징이죠. 그게 제주도 사람들의 속도고요. 아, 그래도 걱정 마세요. 금방 적응될 거예요. 바람이 시원하고, 물도 맑아서 여기서 살면 다들 편안해져요."
은철은 그녀의 말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 제주도 사람들은 참 차분하고, 나처럼 부산에서 온 사람은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군."
백은지는 그 미소에 작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응, 아무리 힘든 일 있어도 제주도 사람들은 한 템포 느리게 살아요. 그게 이곳의 매력이에요."
그 후로 은철은 백은지와 자주 만났다. 마을을 걷거나, 바닷가에서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은철은 백은지에게 점점 마음이 끌렸다. 그녀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그와는 다르게, 양지윤은 다소 거침없고 활기찬 성격을 가졌다. 피란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아이돌 연습생인 양지윤은 제주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녀였다.
어느 날, 은철은 백은지와 함께 바닷가에 앉아 있었다. 바람은 세게 불고, 파도는 바위를 부딪히며 거친 소리를 냈다. 은철은 백은지의 옆에서 조용히 앉아,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존재감을 느꼈다.
"은지야, 제주 바람은 참 시원하다..." 은철이 말을 꺼냈다.
백은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제주 바람은 다른 데랑 달라. 사람 마음도 시원하게 해주고, 혼자서도 외롭지 않게 만들어줘."
은철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응, 고맙다. 너랑 얘기하면서 많이 위로가 되는 것 같아. 여기서, 마을 사람들하고 조금씩 익숙해져 가는 것 같기도 하고."
백은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은철 씨, 아무리 어려운 일 있어도 이곳 제주에서는 바람을 타고 다 풀려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요."
그 말을 듣고 은철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가 마음속에서 느끼는 불안한 감정은 자신도 잘 설명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은철은 혼자 바닷가를 걸으며 그 생각을 반복했다. "왜 나는 백은지에게 끌리는 걸까?" 그는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그때, 양지윤이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밝은 웃음을 지으며 은철에게 다가왔다. "은철 씨, 오늘도 바다에서 놀아요! 물이 진짜 시원해요, 같이 들어가요!"
은철은 잠시 고민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가자."
양지윤과 함께 물속으로 들어가며 은철은 다시 한 번 복잡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양지윤의 활기찬 에너지와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은철을 끌어당겼지만, 백은지의 조용하고 따뜻한 마음도 그를 놓지 않았다. 그는 도무지 무엇이 맞는지, 어떤 감정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은철은 제주도 바람을 맞으며 생각했다. "하모나, 사랑은, 알다가도 모르겄다…" 그의 마음 속에서 사랑이란 무엇인지, 누구에게 마음을 둘 것인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마치 제주도의 바람처럼, 그 감정은 알다가도 모를 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