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05 19:17•조회 58•댓글 3•필견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사고였다고 했던 것 같은데, 자세한 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아버지 일하는 곳에서 건너건너 들었을 뿐이니까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패륜아라 그럴지 모르겠지만, 전 너무 기뻤습니다. 더는 혼나지 않아도 되거든요. 이걸로 해방입니다. 당장은 흉터가 지워지지 않겠지만, 괜찮습니다. 이럴 거면 뭐 하러 그리 아등바등 살았나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럴 때면 사람 목숨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게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하튼 다 지나간 일입니다. 그때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한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뭐 달라지겠습니까?
장례식은 간단했습니다. 일가 친척도 없고, 종교도 없었으며, 그래서 조문객도 별로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정년퇴직 후, 큰 교회에서 경비를 한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는데,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습니다. 관 안에 누워있는 얼굴을 보았습니다. 평온한 표정이 꽤 낯선 게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데... 바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영정사진 속 얼굴은 꽤 단정하게 미소 짓고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어둔 게 웃겼지만, 식이 끝나지 않아 예의를 지켰습니다. 식장 안에는 가끔 혀를 차는 소리, 수군거리는 잡음, 탄식, 끝으로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떨어지는 시선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위해 울어주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도요.
발인식 운구를 할 땐 돈을 꽤 지급했습니다. 그땐 차라리 무연고자나 될 것이 지란 생각에 꽤 투덜거렸습니다만, 다니던 회사에서 보낸 근조 화환과 넉넉한 축의금을 보자 금방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화장을 거친 유골은 해양장을 치렀습니다. 법이 바뀐 덕분에 납골당에 쓸데없는 돈을 헌납하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장례 절차를 모두 마무리하니 해가 중천이었습니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오는 길에 김밥집에 들러 라면을 먹었습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속에 들이지 못하겠더라고요.
제 집은 작은 원룸이었지만, 혼자 살기엔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었습니다.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하고, 가구 위치도 바꾸면서 기분 전환을 했습니다. 핸드폰에서 나오는 댄스 음악들이 한층 더 기분을 돋워주었습니다.
한창 대걸레질인지 뭔지 모를것이 무르익어갈 무렵, 인터폰이 울렸습니다. 처음엔 길게 한 번, 곧 짧게 두 번, 세 번 울리더니, 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저는 그제야 급히 음악을 끄고 빠른 걸음으로 인터폰 앞에 섰습니다. “뭐해? 얼른 문 열어!” 라는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을린 피부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그의 이름은 조안. 저의 몇 없는 친구이자 형사입니다. 그는 안경 너머의 날렵한 눈매로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눈빛을 본 적이 있습니다. 손에 무언가를 쥔 것도 아니고, 목소리를 크게 높인 것도 아니었는데, 사람들의 어깨를 기울이도록 만드는 힘이었죠. 청소가 끝나면 커피를 한잔하려고 했는데, 그건 잠시 미뤄야 했습니다.
문을 열자, 그는 신발도 대충 획획 벗더니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주변을 살피던 그는 검은 봉지를 탁자에 톡 던져 놓더니 근처 냉장고로 갔습니다. 안을 살피며 “막걸리 좀 사다 놓으라니까.” 라고 투덜거리기를 잠시, 맥주 두 캔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 뒀습니다. 그러고는 외출로 되어있던 보일러를 실내로 바꾸고 바닥에 푹 잠기듯 앉았습니다.
저는 검은 봉지 안에 든 무언가를 꺼냈습니다. 떡볶이였습니다. 그것도 막 만들어 따끈따끈한. 그 아래 하얀 종이 포장지엔 튀김이 있었습니다. 식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배가 고프더군요. 식욕이 그리 왕성한 사람이 아닌데, 좀 놀랐습니다.
“먹자.” 라는 말과 동시에 우리는 맥주 캔부터 땄습니다. 떡볶이와 튀김을 안주 삼아 낮술이란 건 일생에 처음이었습니다. 낯설지만 기분 좋은, 오랜만에 그런 마음이 들어서였는지 저도 모르게 몸이 떨리고 실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조안도 넌지시 웃었습니다.
그러더니 “네가 그랬냐?”라고 묻더군요. 하지만 전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질문으로 답하자 그는 갑자기 정색하더니 좀 더 직설적으로 “뭐긴, 너희 아빠 말이야.”라고 말 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만큼 아버지를 미워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니었기에 당연히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겁니다. 조안은 저를 제 아비를 죽인 원수이자 용의자로 보고 있단 것이죠. 하지만 조안은 원래 이런 녀석입니다. 그래서 친구도 저 말고는 거의 없고요. 저 역시 친구는 조안뿐입니다. 이런게 친구 사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엔 휠씬 복잡한 관계가 많으니 대충 이해해 주시길.
“그럴 용기가 있었다면, 집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그 말에 조안은 혀를 차더니 쉽게 수긍했습니다. 그날따라 그의 검은 눈동자가 더 검게 보였습니다. 그로부터 우리는 꽤 오랫동안 말 한마디 없었습니다. 방안에는 술을 홀쩍이는 소리, 식은 떡볶이를 먹는 소리, 눅눅해진 튀김이 바스러지는 소리, 작은 벽시계의 초침 소리 뿐이었습니다. 조안은 그로부터 약 3시간 정도 더 머무르다가 돌아갔습니다.
조안이 돌아간 뒤 상을 정리하고 남은 음식은 전부 음식물 쓰레기 봉지에 넣은 뒤 냉동실에 처박았습니다. 혼자 사니 이런 것도 습득이 되더군요. 이젠 익숙합니다. 5시도 넘기지 않은 시간인데 해가 기울고 있었습니다. 전 커피 포트에 담긴 물을 모두 버리고 침구를 깔아 잠을 청했습니다. 그날 새벽, 급작스럽게 잠에서 깬 저는 먹은 음식을 모두 토했습니다. 하얀 신물이 올라올 때까지 속을 게워 내고 화장실을 겨우 벗어나니 바닥을 나뒹굴며 발작했습니다. 흐릿하게 아버지의 실루엣이 보이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후로는... 잘 기억나질 않는군요. 아마 기절한 듯하네요.
조안이 집에 들렀다가 간 지 한 이 주 정도 흘렀습니다. 그 사이에 전 회사로 복귀해 평소처럼 일을 했습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경찰 둘이 절 찾아오기 전까지는요.
그 둘은 절 카페로 데리고 갔습니다. 덩치 큰 두 명이 제 양옆에 있으니, 잘못이 없더라도 위축 되더군요. 그들은 본인들을 조안과 함께 일하는 동료라 소개했습니다. 경찰이란 얘기에 또 아버지 얘길 꺼내려나 싶어 신경이 날카로워졌지만, 착잡하고 복잡한 표정을 보자 그게 아니란걸 깨달았습니다. 그제야 전 조안의 죽음을 직감했습니다. 그들이 제게 무언가 물어보고 말해주긴 했는데, 그것까지 세세하게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싸늘한 감정이 목구멍을 꽉 움켜줘는 것만 같았습니다. 머리가 흔들리면서 마음도 흔들렸습니다. 차마 왜냐고 입이 떨어지기도 전에 저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깨어났을 땐 병원이더군요.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전 급히 회사에 먼저 연락을 했습니다. 사정을 얘기하니 떨떠름한 반응이긴 했지만, 그땐 어영부영 넘어가 잘리지 않았었습니다. 당장 일할 사람을 구하기 쉬운 게 아니니 넘어간 거겠죠. 이 상황에서도 회사 생각을 했다는 게 우스웠지만, 어쩌겠습니까? 이젠 제게 이것밖에 남지 않았는걸요. 그것뿐입니다. 정말로요. 그래서 아직도 이해가 잘 안됩니다. 어째서 계속 절 찾아오시는 겁니까? 당신도 제가 살인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지긋지긋하군요. 그로 인해 주변에선 아직도 절 살인자로 의심하고 두려워합니다. 그 눈빛 아십니까? 겉으로 웃는 척하면서 믿지 않는 눈빛이요. 그래요. 아무도 절 안 믿어요. 그렇게 제 삶은 완전히 파괴되었죠. 이상해요. 전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그걸 감당해야 할 건 또 제 몫인 거죠? 세상이 아무리 개인의 이해로 돌아가지 않는다지만, 이건 정말...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제가 세상에 태어난 게 잘못인 걸까요? 그래도 좀 살아보려고 아등바등하는 게 그렇게 우스워 보였을까요?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던 게 그렇게 잘못된 일이었나요? 저 역시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한데도 어쩔 수 없었어요. 경찰들이 몇 번이나 절 다시 집에 데리고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닙니다. 몇 번이나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저는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조안의 동료 중 한 명이 언제 한번 또 찾아와 조안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습니다. 어떻게 알게 됐느냐부터 친해진 계기나 그런 소소한 것들요. 궁금했나 봅니다. 심문 포함해서요. 악착같은 걸 보니 절 범인으로 몰아 집어넣고 싶은 것 외에도 다른 감정이 있었던 것 같더라고요. 친구는 나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제 착각이었나 봅니다. 조안은 저랑 있던 시절과는 다르게 앞에 나서면서 활발하게 활동했다고 합니다. 성격도 둥글고 서글서글해서 누구나 다 좋아했다고 하네요. 저와 있을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라 신기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슨 동아리? 같은 걸 만들었다는데. 그렇게까지 내가 알아야 하나 싶더라고요. 그 형사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도 모르겠고요.
그 후로 기자라는 사람들이 몇 번 찾아왔습니다. 그중에 진실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그래요. 기자란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이죠. 그게 사실 그대로 이건 아니건 그들에겐 별로 중요한 게 아니지만요.
아무튼 당신도 아직 궁금하십니까? 사실 별건 없는데, 필요하다면 말해 드리겠습니다. 아... 아버지요? 뜬금없이? 이거, 무슨 기억을 꺼내는 실험인가요? 음... 뭐, 알겠습니다. 그게 정 궁금하시다면... 생각나는대로 말해드리죠.
사실 기억이란 게 과거의 것이라 모두 정확하진 않습니다. 일부는 사진처럼 선명합니다만, 어떤 것들은 흐려졌습니다. 흐려진 것 중에는 몇몇 이름이 포함됩니다. 이름이 흐려지면 부르지 않게 됩니다. 부르지 않으면 기억과 멀어지다가 사라지는 겁니다.
제가 처음 본 아버지는... 그래요. 정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짧은 머리를 뒤로 넘겨 포마 드로 단장하고, 깔끔한 스타일을 고수하면서도 곧은 자세를 유지하려 했죠. 그리고 목소리를 항상 낮게 깔았고, 웃는 얼굴은 드물었습니다. 전 그때 어른이면 모두 그런 줄 알았습니다. 아! 언제 한 번 아버지가 환하게 웃던 때가 있었습니다. 군 후임이란 사람들을 집에 데리고 와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눴을 때였죠. 믿어지십니까? 그 아버지가 말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격식 없이 소탈하게 구는 아버지를 처음 봐서 꽤 선명한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그땐 충격을 좀 받았습니다만, 그래도 기분 좋아진 아버지한테 빳빳한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용돈으로 받아서였는지 금방 가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조안이 아버지를 좀 닮은 거 같네요. 아니, 생김새를 말하는 건 아닙니다. 뭐랄까... 풍기는 아우라 같은 게 강렬하다? 예, 그런 느낌입니다. 뭔지 알겠어요? 그래도 조안은 저에게 잘해줬습니다. 아버지와는 다르게요. 적어도 그에게는 집무실이 없었으니까.
집무실 말입니까? 집무실은 말 그대로 집무실인데? 이런저런 여러가지 일을 하던 아버지 개인 공간이요. 아... 혹시 모르십니까? 으음... 다른 집엔 잘 없군요. 그래요. 실은 저도 정신교육 할 때 빼곤 안 들어가 봤습니다. 넓은 공간에 중후한 목재로 만든 책상과 그 위에는 결재 서류 더미와 함께 펜, 전화기, 그리고 재떨이가 놓여 있었습니다. 화려한 장식이나 불필요한 물건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여 길시정언한 느낌을 구였습니다. 그리고 책상 을마주보는 벽에는 우리나라 국기와 당시 대 통령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뱀같이 차가운 눈매에 꼭 다문 입술, 정면을 보는 시선, 흐트러 지지않는 자세까지... 누굴 닮았는지 바로 알겠더군요. 재미있는 건, 군핫발에 챌 때는 항상 그 대통령 사진이 가장 먼저 보였다는 겁니다. 저는 대통령과 눈을 마주한채 빌고 또 빌며 속으로 국가를 불렀습니다. 그러면 이 시간이 좀 빨리 지나가는 것 같더라고요. 아버지께 그렇게 맞고 나면 어머니가 약을 발라줬습니다. 이 집에서 유일한 저의 편이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진 말이죠. 한 가지 후회되는 건 어머니 살아 있을 때 아버지한테 맞서지 못했다는 겁니다. 시대적 상황이나 체급 차이를 고려하면 말도 안 되는 건 압니다만, 그래도 억울한 건 억울한 겁니다. 제가 그렇게 반항적인 성격이 아니란 것에 대해서 말이죠. 그래도 대학이 기숙사인 덕에 그 집에서 나올 수 있던 건 행운이었습 니다. 아버지는 전부 수긍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제가 떠나는 걸 막진 않았습니다. 본인 손아귀에서 벗어나도 돌아올 거로 생각했겠죠. 실제로 처음엔 그랬고요.
기숙사에 밤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그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낮고 단호한 목소리... 멸사봉공을 떠올릴 때마다 몸이 벌벌 떨리고 식은땀이 흘렸습니다.
나는 기존 관습을 벗어나기 위해 다른 습관을 길들이려 노력했습니다. 기숙사 방의 불을 끄고, 문을 잠그고, 돌아서서 한 번 더 확인했습니다. 손잡이는 아래로, 위로, 다시 아래로. 소리가 납니다. "덜컥." 그 소리가 나야 겨우 잠에 들 수 있었습니다. 소리가 나지 않으면 다시 합니다. 두 번, 세 번. 횟수는 정해져있지 않습니다. 정해진 횟수를 만들진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으니까요.
창틀을 닦을 때는 왼쪽부터 합니다. 걸레질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마루를 쓸 땐 모서리를 세 번습니다. 빗자루 끝이 벽에 닿을 때 일정한 소리가 나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처음부터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잠들 수 없었습니다.
실수하면 어떻게 되냐고요? 흐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때로 돌아갑니다. 바로 이 정신이... 그래서 잡아먹히지 않으려 꽉 붙들지만, 어느새 복도에서 구두 소리가 들리죠. "뚜벅 , 뚜벅, 뚜벅." 발 뒤꿈치가 바닥을 누르는 각진 소리에 간격은 규칙적입니다. 그 소리는 숨을 들이켜면 멈췄다가 내쉬면 다시 시작되길 반복 합니다. 그리고 그 발소리는 문 앞에 멈춥니다. 노크하는 소리 3번. "똑, 똑, 똑." 그러나 답하지 않습니다. 이불을 끝까지 올려쓰고 귀를 틀어막죠. 그게 실제인지 꿈인지 아니면 기억의 산물인지 모르니까요. 잠이 오지 않는 몸은 부유합니다. 물론 실제는 아니죠. 그냥 그런 느낌이 든단 소리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근데 이건 소리뿐만이 아닙니다. 냄새도 마찬가지죠. 씻어도 씻어도 사라지지 않는 지독히 몸에 밴 냄새를 아십니까? 짙은 향수의 군복, 가죽 벨트, 담배 연기, 술, 머리에서 뺨에 입에서 흐르는 피.. 그것은 때때로 피부가 먼저 반응 하기도 합니다. 심장이 빨라지고, 시력을 빼앗더니 머리를 지배하면 그땐 제가 제가 아니게 됩니다.
또 바뀐 게 있다면, 그때부터 기록하려 했단겁니다. 길지 않고 짧게.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요. 이때는 날짜, 시간, 현상 정도만 적습니다. 감정은 변화하므로 적지 않습니다. 기록을 남길 때 이런 점은 주의해야 합니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처음엔 뚜렷했던 선도 시간이 지나면 경계가 사라집니다. 그러다보면 남기지 말아야 할 게 남고, 지워진 줄 알았던 게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지금처럼 말이죠. 괴로움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결 극복하기 위해선 아무렇지 않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땐 그런 일이 있었다며 별거 아닌 것처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대상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어요. 이겨내기도 전에 말이죠.
종종 어떤 꿈을 꿀 때가 있습니다. 오랜 초상화를 보는 그런 꿈. 색은 바래고 금이 갔지만, 한때 무엇이 그려져 있었는지 대장은 알 수 있는 공간에 있습니다. 그 위로 새로 칠한 그림이 겹칩니다. 서로 다른 시대가 뒤엉킨 색과 선은 누군가를 그린 것처럼 하나로 얼룩집니다. 너무 가까우면 색의 황홀함에 취하고 너무 멀면 초점이 흐려지는 그런 그림이었습니다. 나는 그걸 명확히 확인하기 위해 거리를 조절했습니다. 날카로운 눈매, 굳게 다물면서도 살짝 미소 짓는 입꼬리. 처음엔 우연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죠. 익숙했습니다. 너무나도 익숙했습니다. 비로소 그게 무언지 알 수 있었죠. 물론,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오래된 그림자를 다른 각도에서 다시 본 것뿐이니까. 처음 보는 듯하지만, 이미 거기 있던... 마치 벽에 오래 붙은 얼룩처럼, 아무리 지우려 애써도 희미 하게 남은 것. 그러나 알게 되었다고 해서 벗어나는 건 아니었습니다. 뿌리만큼 깊은 피를 바꾸지 않는 한 나는 그 사람의 자식입니다.
어느 날, 목욕탕에서 거울을 본 적이 있습니다. 분명 나인데, 가끔 그 사람의 얼굴이 보일 때마다 낯설어집니다. 그 눈은 아주 오랫동안 머물며 나를 바라봅니다. 존재가 사라진 지금까지도요.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다 끝났습니다. 생각해보면 더 기억날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도 않고요.
어땠냐고요? 음... 글쎄요.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처음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아버지나 조안이나 둘 다 죽었고, 그래서 제 미래에 대해서 관여할 수는 없겠습니다.
아! 있긴 하겠네요. 예를 들면, 조안네 경찰팀이나 뭐... 제가 모르는 분야에 있는 과거의 망령들이나... 근데 사실 그들은 제가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이걸로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보란듯 잘 살아서 복수하는 것도 좋겠지만, 저는 그렇게 용기가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를 괴롭게 하든 혹은 사랑하던... 그런 관계 속에 있던 이들이 떠나고 아무렇지 않은 존재들이 우리에 대해 떠들 때 밀려드는 이 감정을 어떻게 이해하겠어요? 최소한 경찰과 기자들이 그리고 당신이 한 인간의 명예를 존중했다면, 지켜줬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무엇보다 이 피는 여기서 막을 내려야 합니다. 제 목숨 하나쯤은 제 스스로 선택하겠단 말 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선 말리지 마세요. 우린 어차피 다른 이를 이해하지 못 합니다. 그러니 당신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저를 말릴 권한도 자격도 없는 거고요. 인생이란 그런 거로 생각하세요. 제가 사라진 다음엔 솔직히 어찌 되든 무슨 상관이랍니까? 살 사람은 알아서들 살면 그만입니다. 그럼, 헛고생하지 마시고, 안녕히.